국보 순례

국보 73호 금동삼존불감 (金銅三尊佛龕)

창포49 2010. 6. 14. 14:01

 

 

국보   73호
명   칭   금동삼존불감
  (金銅三尊佛龕)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佛龕)이라고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작품은 높이 18㎝의 작은 불감으로, 청동으로 불감과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금칠을 하였다. 불감 내부를 살펴보면 난간을

  두른 사각형의 기단 위에 본존불과 양 옆에 보살상이 있으며, 그 위에 기둥과 지붕으로 된 뚜껑이 덮혀 있다.

 

  법당 모양의 뚜껑에는 앞면과 양쪽에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안에 모셔진 불상을 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본존불은 얼굴이 세련되지 못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을 간략한 선으로 표현했다. 몸 뒤편에 있는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나누어져 있으며, 불꽃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다. 본존불 양 옆의 보살상도 구슬로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형식이나 표현 수법이 본존불과 같다.

  불감은 지금도 금색이 찬란하고 지붕에 녹청색이 남아 있는 등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본존불의 긴 허리,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옷주름, 그리고 보살이 쓰고 있는 구슬로 장식한 관(冠) 등 여러 양식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중국 북방 계통의 영향을

  받은 11∼1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의 목조건축 양식과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두루마리 비단에 담채. 38.7x106.5cm.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몽유도원도>가 현재의 상태대로 상,하 두 개의 두루마리로 표구된것은 1947년 동경 용천당의 마유야마 준기치씨 손에 들어간 직후였다. 이 두루마리의 크기는 각권 모두 높이가 같은 40cm인 반면, 길이는 상권이 8.57m. 하권이 11.12m로 총연장은 19.69m. 근 20m나 되는 장폭이다. 실제 그림의 크기는 세로가 38.6cm. 가로가 106.2cm이다. 이 두루마리의 바깥은 녹색 바탕에 보상당초문이 있는 비단으로 되어 있다.

 

안견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생년몰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본관은 지곡(池谷, 자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다. 세종 연간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때까지도 화원으로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때에 도화원의 종 6품 벼슬인 선화에서 체아직인 정 4품 호군으로 승진되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의 화원으로서 품계의 한계인 종 6품의 제한을 깨고 승진한 최초의 예가 된다. 그는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면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고화들을 섭렵함으로써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는 토대로 삼았다.

<몽유도원도>는 현재 일본의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어떤 경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황수영박사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 현대에 들어와 서울의 진고개 부근에서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나 더이상 확인할 길은 없다. 지금까지 추적이 가능한 범위내에서 확인된 바로는 <몽유도원도>를 소장했던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소장가는 큐슈 가고시마 출신의 도진구징이라는 사람이며, 그의 생애와 활동을 미루어 보아 <몽유도원도>는 적어도 1900년 이전에 일본에 건너갔다는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77) 어느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여행하고 거기서 본 바를 안견에게 설명해주고 그림으로 그리게 한것인데,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 최고의 그림이며, 한국 회화사 전반에 걸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라 할수 있다.

<몽유도원도>에는 도원의 경치를 그린 그림과 함께 안평대군의 발문, 그리고 안평대군의 주위에 있던 박팽년, 최항, 신숙주 등 당시의 쟁쟁한 인물 21인이 자필로 쓴 찬시도 함께 실려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몽유도원도>는 회화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예 작품으로서, 또는 당시 안평대군을 둘러싼 중신들과의 관계를 알아볼수 있는 사료로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수 있다.

두루마리 안쪽에는 첫머리에 '몽유도원도' 라고 쓰여진 제첨(題簽), 제목이 붙어있고, 그 다음에는 폭 25cm의 푸른색 비단 바탕에 여섯 행의 붉은 글씨가 쓰여있따. 이 주서는 안평대군이 1450년, 즉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뒤에 쓴 것이다.

「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世間何處夢桃源

    은자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野服山冠尙宛然

    그림 그려 보아 오니 참으로 좋을씨고                   著畵看來定好事

    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                          自多千載擬相傳

    그림이 다 된 후 사흘째 정월밤                            後三日正月夜

    치지정에서 마침 종이가 있어                              在致知亭因故

    한마디 적어 밝은 정취를 기리노라」                    有作淸之

이 시문에 이어서 몽유도원의 세계가 전개된다.




몽유도원도 왼쪽부분





몽유도원도 중간부분



몽유도원도 오른쪽부분
 

그림을 보면 화면의 왼쪽 아래에서부터 오른쪽 위로 꿈속에 나타났던 장면이 점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화면의 왼쪽은 현실 세계가, 화면의 중간은 도원으로 들어가는 동굴과 험난한 길이, 오른쪽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도원의 이상 세계가 그려져 있다.

이그림의 중심 부분이라고 할수 있는 도원의 경치를 보면 위쪽에 고드름처럼 매어 달린 바위가 이 곳이 동굴임을 상징하고 있으며, 복숭아나무들과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텅 빈 초가집들이 보이고, 영롱한 복사꽃 사이의 물가에 작은 빈배가 매어 있다.

이런 장면들은 안평대군이 정유년 세종 29년 4월 20일 밤에 꾸었던 꿈에 나타난 장면들을 기초로 한것이지만, 이꿈의 내용은 <도화원기-진나라 도연명이 처음 지은 것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전원시인으로서 도연명의 정신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와 관련되어 있다. 즉 현실 세계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보는 이상향으로서의 측면과 현실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도가적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볼수 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두가지 측면이 안평대군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안평대군이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읽어 늘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다가 꿈을 꾸게 되었고, 꿈속의 정경도 그가 읽었던 글의 내용과 비슷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볼수 있다.

결국 <몽유도원도>는 왕자로서의 안평대군이 현실에서 겪어야 하는 고민 즉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거기에서 오는 갈등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찰과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서 그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고, 또 알고 있었던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세계를 찾아 꿈속에서 홀연히 도원의 세계를 여행하였으며, 그가 꿈속에서 경험한 황홀한 이상 세계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리게 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 안평대군이 쓴 발원문

정유년 4월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른하여 잠이 깊이 들어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박팽년과 더불어 한곳 산 아래 당도하니, 층층의 멧부리가 우뚝 솟아나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한 채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르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성대며 어디로 가야할 바를 몰랐다. 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 이 길을 따라 북족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 하므로 나는 박팽년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 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를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틔어서 2.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여 둘러보기를 오래하고, 박팽년한테 이르기를 "바위에다 가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항, 신숙주 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자들이다.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하략)...

 

* 도연명의 <도화원기>

동진의 태원연간에 무릉의 어떤 사람이 고기를 잡아 생활을 했는데, 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복숭아꽃 나무숲을 만났다. 냇물 양쪽 수백 보에 걸쳐 복숭아나무 이외에는 잡나무가 일체 없고, 향기로운 풀들만이 산뜻하고 아름다우며 떨어지는 꽃잎들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어부가 이것을 매우 이상히 여기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 그 복사꽃 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보았다. 숲이 다하는 곳에 물이 흐르고 문득 산 하나가 나타났다. 산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었는데, 마치 빛이 있는듯하였다.

곧 배를 버리고 구멍을 따라 들어갔다. 처음은 아주 좁아서 사람이 겨우 들어갈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수십보를 가니 확 뚫리며 밝아졌다. 땅은 평평하고 넓으며, 집들은 엄연하고, 좋은 밭과 예쁜 연못과 줄지은 뽕나무와 대나무 등이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뚫려 있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가운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남녀의 옷 입은 것은 모두 바깥세상 사람들과 같았고, 노인이나 어린이들은 다 같이 기쁘고 즐거워하였다. 그곳 사람들이 어부를 보고 크게 놀라 어떻게 왔는가를 물었다. 갖추어 답하니 당장에 초청하여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식사를 대접하였다. 이 어부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캐물었다.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선세에 진나라 때의 난을 피하여 처자와 읍인들을 이끌고 이 절경에 와서 다시 나가지 않았소, 그래서 드디어 바깥사람들과 떨어지게 되고 말았소." 라고 말하면서 "요즘은 어떤 세상이오?"라고 묻는 것이었다. 한나라가 있는 것도 모르고 위진은 말할것도 없었다. 이 어부가 일일이 들은 바를 말하니 모두들 놀라고 탄식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각기 다시 자기 집에 그를 끌고 가 모두 술과 음식을 내었다. 그 후 어부는 밖으로 나와 배를 찾아서 먼저 길을 오며 곳곳에 표시를 했다. 군에 이르러 태수를 만나 자기가 겪은 일을 설명하였다. 태수는 곧 사람들을 시켜 그를 따라가서 표시한 바를 찾도록 했지만 다시 그 길을 찾지 못했다. 하남성 남양현의 유자기라는 사람은 고상한 선비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흔연히 가 볼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머지않아 병으로 죽었다. 그 후로는 마침내 도원으로 가는 그 길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