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75호 표충사청동함은향완(表忠寺靑銅含銀香완)

창포49 2010. 6. 15. 20:38

 

 

국보   75호
명   칭   표충사청동함은향완
  (表忠寺靑銅含銀香완)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산31-2 표충사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밀양 표충사-표충사삼층석탑, 만일루, 영정약수 |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셔둔 호국사찰이다. 밀양시 단장면에 위치한 재약산(천황산)의 남서쪽 기
슭에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찰로 신라시절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라고 했다고 한다.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황면선사가 재건하여 영정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데 이때 의 이야기는 지금도 표충사 경
내에 위치한 영정약수와 함께 전해져 오고 있다.(아래 참고). 재약산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폐사되었다가 1839년 헌종 5년에 사당 3칸을 신축하여 무안면 표충사에 있던 청허, 
사명, 기허대사의 진영(眞影)과 위패를 옮겨와 절 이름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나라에 위기
가 생기면 너나없이 호국의 의지를 불태웠던 옛 선조들의 애국심이 묻어있는 표충사에는 표충사3층석탑, 
만일루, 영정약수 등이 있다. 
표충사3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높이 7.7m, 기단부는 폭이 좁은 지대석 위에 단층 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받침은 4단으로 줄어들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1층 탑신의 높이가 기
단중석(基壇中石)보다 다소 높으며 지붕의 선은 예리하지 못하지만 단정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노반·복발·평두·찰주석·보개·수연이 길게 솟은 찰주에 꿰여 있다. 노반은 네 귀퉁이가
반전되어 지붕을 연상시키고 복발과 평두 사이에 불필요한 원기둥형 별석이 있으며, 평두 위로는 보륜과 
이것을 연결시키는 3개의 찰주석이 있다. 그리고 8각의 보개와 윗부분이 깨진 수연 위로 찰주가 솟아 있
다. 
8세기 양식보다 진보된 양식으로, 9세기 신라 석탑의 아담하고 단정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대표적 불탑
으로 보물 제467호이다.
만일루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142호로 단장면 구천리에 위치하고 있는 표충사 만일루는 H자형의 독특
한 건물이다. 이것은 1860년 당시 방장 월암상인이 조성한 것으로 48칸의 선실을 108평의 부지에 지어 동
립 고사라 이름 지었는데, 혜원 법사의 유풍을 받드는 뜻을 담고 있는 불교의 48원과 108번뇌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한다.
이곳은 아미타블을 봉안하고 대중들의 정진 장소로 쓰였으며 무량수각 혹은 서래각으로 편액되어 선방으
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만일루는 1926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29년에 중건, 지금의 것은 1992년에 
보수된 것이다. 중건을 계기로 현판도 영남 제일선원으로 새로 걸었다. 이곳은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역임한 효봉대종사가 말년을 보내고 열반한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영정약수는 신라 흥덕왕 때에 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 명약을 찾던 중 황발선인이 이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와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에 왕이 친히 선사를 찾아와 크게 칭송하나 황벌선인이 말
하기를 이곳 산초와 유수가 모두 약초요 약수라고 했다.
왕은 그 말에 감탄하여 탑을 세우고 가람을 부흥시켜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하고 이름 또한 영정약수의 
이름을 따서 영정사라고 했다고 한다.

                 

  

 

 

 

대광전은 표충사의 큰 법당이다.
법당이란 진리로써 가득 채워져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법당에는 모든 번뇌와 미혹을 밝혀서 불멸의 생명, 무한한 행복과 영원한 자유를 이룬 부처님이 계신다.  스스로 이기심과 탐욕과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켜서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눈 멀게 하는 중생을 향해
무궁무진한 법문의 세계를 펼쳐 놓으신 곳이 바로 법당이다.
대광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깊이 신봉 되어온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존불은 석가모니불(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화함),
약사여래불(동방 유리광세계의 주인.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하게 하는 등의 12대 서원을 세운 부처님이며, 손에 약함을 들고 있음),
아미타불(서방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며 그의 광명과 자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에까지 미  치며 그 광명을 받은 사람은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함)이며,
이들 부처님은 중생의 염원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깊이 신봉되어 왔다.
표충사의 대광전은 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화재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중건, 중수 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조선후기에 중건한 정면 5칸, 측면 3칸, 외3포, 내3포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광전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팔상전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 명약을 찾던 중 황발선인이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와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에 왕이 친히 선사를 찾아와 크게 칭송하나 황발선인이 말하기를
  이곳 산초와 유수가 모두 약초요, 약수라 하였다.
  왕은 그말에 감탄하여 탑을 세우고 가람을 부흥시키고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하고,
  사명 또한 영정약수의 이름 따서 영정사라 하였다.
  지금도 이 영정약수를 찾는 발길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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