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71호 동국정운<권1,6>(東國正韻<卷一,六>)

창포49 2010. 6. 13. 16:34

 

 

국보   71호
명   칭   동국정운<권1,6>
  (東國正韻<卷一,六>)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조선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중국의 운(韻)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종 29년(1447) 9월에 완성되자 간행하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인 세종 30년(1448) 11월에
성균관,

  사부학당 등에 보급되어, 이 책이 간행되고 보급되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현재 이 책은 전 6권 가운데 1권과 6권만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본문의 큰 글자는 나무활자이고, 작은 글자와 서문의

  큰 글자는 갑인자이다. 글자체는 큰 글자가 진양대군의 글씨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연구자료로서의

  중요성도『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글자를 만든 배경이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기본자료가 된다.

 

 

 

 

 

 

물처럼 사노라면 후회 없으리

  

물처럼 살거래이

만물을 살리는게 물인기라

 

제 갈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게 물인기라

 

어려운 구비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게 물인기라

 

맑고 깨끗하여 모든 더러움을

씼어 주는게 물인기라

 

넓고 깊은 바다를 이루어 고기를 키우고

되돌아 이슬비가 되는게 바로 물이니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하는기라

 

물처럼 살거래이

물처럼 사노라면 후회 없을기라....

 

 

*경봉*큰스님  (양산 통도사.  1892 ~1982) 

 

 

 

 

 

  경봉(鏡峰)스님 (1892∼1982)

 

     현대의 고승. 광주김씨.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諡號)는 원광(圓光). 경상남도 밀양출신.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이다. 7세 대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에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

     1907년 6월에 출가하여 양산 통도사 성해(聖海)의 제자가 되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를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국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하루는 불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푼어치의 이익이 없다(終日數 他寶 自無半錢分)."라는 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고,참선공부를 하기 위하여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을 해결 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 연(摩訶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 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 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철야 로 불사하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 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 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話頭)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 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1930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의 원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50여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 화의 선구적 소임을 하였다.

     1935년 9월에는 통도사주지, 1941년 3월에는 서울 안국동에 있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국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 院)

     이사장,  1949년 4월에는 다시 통도사주지를 역임하면서, 전국의 선승들을 지도하여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1953년 11월에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極 樂護國禪院_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 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내원 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 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逍遙自在)

     하였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 자들이 가득하였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90세의 노령에도 시자(侍者)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 는데, 매회마다 1, 000여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가람수호(伽藍 守護)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莊嚴石 燈) 18좌(座)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 정진처 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암 정법보각(正法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 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파고 다 공원 안에 만해선사기념비 건립도 추진하였다. 또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82년 7월 17일에 미질을 보인 뒤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 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속법해 (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 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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