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62호 금산사미륵전(金山寺彌勒殿)

창포49 2010. 6. 8. 00:24

 

 

국보   62호
명   칭   금산사미륵전
  (金山寺彌勒殿)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금산사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며, 우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3층 목조 건물로 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금산사 (金山寺)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절.
 
전라북도 김제시(金堤市) 금산면(金山面) 금산리(金山里)에 있는 절.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고, 766년(신라 혜공왕 2)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건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인조 4)에 재건된 것이다. 이 절은 935년 후백제의 신검(神劍)이 그의 아버지 견훤을 가두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신라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彌勒殿)을 비롯하여 보물로 지정된 석련대(石蓮臺)·석종(石鐘)·오층석탑(五層石塔)·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등이 있다.

 

 

   대적광전 (大寂光殿)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신 사찰 당우 중의 하나.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신 사찰 당우 중의 하나. 화엄종의 법맥을 잇는 사찰에서 본전(本殿)으로 건립하며,
화엄전(華嚴殿),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한다. 원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불과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 즉 삼신불을 봉안함으로써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한국에서는 삼신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까지 오불(五佛)을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는 한국에서 신봉되는 불·보살을
한곳에 모아둔 셈이다. 후불탱화(後佛幀畵)로는 법신탱·보신탱·화신탱을 봉안한다.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해인사의
대적광전과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위봉사(威鳳寺)의 보광명전 등이 대표적이다.
 
▨용화전(미륵전)

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세상에 출현할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미륵전 혹은 용화전이다.
여기에서 ‘용화전’이란 미륵부처님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할 것이고,
용화세계를 이룩할 것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악산- 무제봉 정상...전북 김제시,완주군(793.5m)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홍성(洪城) 출생.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자 피신하여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인제(麟蹄)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 법을 받았다. 1908년 전국사찰대표 52명의 한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여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같은 해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918년 월간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간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고 문학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지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월간 《불교(佛敎)》지를 인수하여 속간하였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뒤 계속하여 불교의 혁신운동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시에 있어서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하였으며, 은유법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작품·저서로 《박명(薄命)》 《흑풍》, 시집 《님의 침묵》 및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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