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36호 상원사동종(上院寺銅鍾)

창포49 2010. 5. 8. 23:03

 

 

국보   36호
명   칭   상원사동종
  (上院寺銅鍾)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상원사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오대산 상원사

 

 

  

   상원사 (上院寺)

   오대산 상원사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사찰. 오대산 중대(中臺)에 있다. 

   705년(신라 성덕왕 4) 보천(寶天)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졌으며, 이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이 재물을 희사하여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다음해 가을에 낙성을 보았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으로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 오히려 이 절은 크게 발전하였다.

   1465년(세조 11) 상원사를 중창하기 시작하여 1466년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남쪽에는 5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1946년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1947년 중창되었고, 6·25전쟁 때에는 이 절에서 수행하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소림초당(少林草堂)·영산전(靈山殿)·동정각(動靜閣)·후원(後院) 등이 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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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암 스님

 

                            일제강점기(1941∼1945)에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1876∼1951) 스님.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으로 일제강점기 불법수호의 정신적 기둥이 된

                                        선지식이다. 당대의 사상적 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참수행의

                                                        정진으로 조계종의 종조를 확립했다.

                                                               특히 선종과 교학의 병행,

                                                선과 염불의 조화 등 극단적 가치에 편중되지 않고

                                    널리 원융무애한 선사상을 펼친 인물로 통한다. 스물두살때 금강산 유람도중

                             장안사에서 행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운수행각에 나섰으며 1905년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의 조실로 후학을 지도하다가 서른다섯에 대각, 이 때부터 인연 닿는 곳마다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던 중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면서 오대산으로

                                                                             자취를 감췄다.

 

 

                            

                                     Odaesan

 

 

 오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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