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84호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창포49 2010. 6. 22. 23:12

 

 

국보   84호
명   칭   
  (瑞山磨崖三尊佛像)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마애불 (磨崖佛)

 
석불의 일종으로 자연의 낭떠러지나 큰 돌에 불상 등을 음각이나 부조로 나타낸 것.
 
석불의 일종으로 자연의 낭떠러지나 큰 돌에 불상 등을 음각이나 부조(浮彫)로 나타낸 것. 그 대부분은 석굴사원 형식으로 만들어지며, 동굴을 보통의 사원처럼 파내기도 하였다. 이 형식은 인도에서는 BC 3세기부터 있었고, 아잔타석굴 등이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에서도 거상(巨像)은 거의 마애상이다. 4세기 중엽부터 만들어진 둔황[敦煌(돈황)]의
천불동(千佛洞)을 비롯한 마이지산[麥積山(맥적산)]·윈강[雲崗(운강)]·룽먼[龍門(용문)]석굴 등 주로 북위(北魏)시대에서 수·당(隋唐)시대까지의 석굴이 알려져 있다. 한국은 서산(瑞山)마애삼존불상·태안(泰安)마애삼존불·단석산신선사
(斷石山神仙寺)마애불상군·경주남산탑곡(慶州南山塔谷)마애불상군·법주사(法住寺)마애여래의상·북한산구기동
(北漢山舊基洞)마애석가여래좌상·파주용미리(坡州龍尾里)석불입상·대흥사북미륵암(大興寺北彌勒庵)마애여래좌상 등
전국적으로 많은 마애불이 남아 있다.

 

 

 
                       ♣ 서산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종 목 사적 제316호
명 칭 서산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가까이에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 보충설명

이 사지( 寺址 )는 언제 창건( 創建 )되었는지 불확실( 不確實 )하나 통일신라말( 統一新羅末 ) 아니면

고려초( 高麗初 )로 보고 있다.
그런데 1968년( 年 ) 4월( 月 ) 이곳에서 백제시대( 百濟時代 )의 금동여래입상( 金銅如來立像 )이 발견( 發見 )되어

백제시대( 百濟時代 )까지도 올려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경내( 境內 )에는 몇몇의 건물 장수석( 長壽石 ) 등이 있을 뿐 아무런 건물( 建物 )이 없다.
그러나 보물( 寶物 )로 지정( 指定 )된 석조 ( 石槽 ) 당간지주 ( 幢竿支柱 ) 오층석탑 ( 五層石塔 ), 법인국사보승탑 ( 法印國師寶乘塔 ) 동탑비 ( 同塔碑 ) 등이 있으며 비문( 碑文 ) 기록( 記錄 )에 의하면 승려 천여명( 千餘名 )이 기거했다 하므로 대찰( 大刹 )이었음이 분명( 分明 )하다.
이곳에서 서산( 瑞山 ) 마애삼존불( 磨崖三尊佛 )까지는 가까운 거리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이 지역은 한국불상의

선구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용현계곡을 따라 들어오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당간지주이다. 그 뒤편으로 오층석탑이 보이며, 뒤이어 좌측에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남아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옛 절의 모습을 다만 짐작할 따름이다. 서산 마애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보원사지는 백제시대 서산 마애불의 본사로 고란사였다는 설이 있으나, 절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창건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절터에서 나온 금동불입상을 6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백제 불상으로

보아, 이 때 창건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원사지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을 보아도 보원사가 이 무렵에 이미 창건되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보원사가 위치한 서산 지역은 중국 남조의 양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에 길목 역할을 했었다. 태안 반도를 거쳐

해미현에 이르는 바닷길은 당시 중국과 교류하는 무역 항로였으며, 해미-운산-예산-부여로 이어지는 육로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보원사는 또한 법인국사 부도비 등 남아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고려시대에도 번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고려초의 고승으로서 고려 개경에서 국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예전에 재주한 바 있는 보원사로 들어갔으며, 975년(광종 26)에 입적하였다. 보원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전에 폐찰된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