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79호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 (慶州九黃里金製如來坐像)

창포49 2010. 6. 19. 22:28

 

 

국보   79호
명   칭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
  (慶州九黃里金製如來坐像)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1934년 경주구황리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구황리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준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앞가슴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데, 그 안에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속옷이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靑山兮要我 - 청산은 나를 보고


나옹선사 (懶翁禪師)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 (懶翁禪師 1320 ~ 1376)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휘는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 본 이름은 원혜(元慧)이다.
속성은 아()씨인데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조선태조(朝鮮太祖)의 왕사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스승 이었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 절터가 있는데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로 중창했고,

그의 출생지 부근 경북 영덕군 창수면 운서산(雲捿山) (해발520m)기슭에 장육사(莊陸寺)를 창건 하고

오랫동안 머물며 참선했다고 전하며,

나옹선사가 입적한 뒤에는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어 수도한 수도 사찰로 유명했다 한다.
회암사 터의 뒤쪽에는 나옹, 지공, 무학, 세분의 부도와 비석이 현존하고 있는데,

비석은 조선왕조 유학사상의 지주였던 목은 이색이 찬하여 지금도 비문이 남아있다.
장륙사(莊陸寺)에는 고려 공민왕 때 건물과 건물 내벽에 그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그가 입적한 남한강변 여주 신륵사에도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비문이 남아 있다.
그의 가송집과 비문을 한글로 해석한 서적으로 나옹록이 있고 연구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