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48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月精寺八角九層石塔)

창포49 2010. 5. 18. 00:14

 

 

국보   48호
명   칭   월정사팔각구층석탑
  (月精寺八角九層石塔)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基壇) 위에 9층 탑신(塔身)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多層)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월정사 (月精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에 있는 절.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에 있는 절.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창건하였다. 그 후 신효(信孝)·신의(信義)·두타(頭陀)·유연(有緣) 등이 절을 확장하였다. 뒷날 1377년(고려 충렬왕 33) 화재로 타버린 것을 이일(而一)이 중창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조선 헌종 10)에 중건한 것이다. 전(殿) 안에는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통례를 깨고 석굴암 불상의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현재 이 절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대장경을 넣었던 경궤, 《금강경》 3권, 인도불상, 난초족자 2개, 고려시대 궤짝 13개 등 다수의 보물과 유물을 전시실 보장각에서 볼 수 있다.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 숲길

 

 

                                   화려한 문살

 

 

                                     

 

                              탄허(呑虛)스님(1913-1983)

   "마음에는 생사가 없다” “삶은 간밤에 꿈꾸는 것과 같다” 學·禪·敎 두루 통달 후학양성
 
   1913년 1월 15일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스님의 법명은 택성(宅成)이고, 탄허는 법호이다. 스님은 젊은 나이에
    기호학파의 거장인 최익현의 후학 이극종에게 한학을 연마하고, 도학에도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세속 학문에 한계를 느낀 스님은 보다 궁극적인 진리를 배우고 익히기 위해 스승을 찾아 나섰다.
    이때 인연이 닿은 것이 오대산에 주석하고 있던 한암(漢岩)스님이다. 한암스님과 3년간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은
    탄허스님은 “진리를 만날 수 있다”는희망을 안고 상원사로 입산했다.
    이때 스님의 나이 21세였다.
 
    탄허스님은 출가한 이듬해부터 3년간 묵언참선(默言參禪)으로 용맹정진했으며, 15년간 오대산 밖으로
    나오지 않는 두문불출 수행으로 오도(悟道)의 길에 들어섰다. 유불선에 두루 통달했던 스님은 평소
    “노장(老莊)의 물아양망(物我兩忘), 역(易)의 태극(太極)자리가 깨닫고 보면 불교의 아공법공(我空法空)의 자리”
    라고 강조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함을 설파했다. 평소 승려 교육에 많은 힘을 쏟은 탄허스님은 불교학의
    최고 학설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하고 〈화엄론 40권〉 〈육조단> 〈보조법어〉〈사교>〈사집〉 등
    많은 불전을 번역했다. 뿐만아니라 정화불사를 비롯해 종단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앞장선
    스님은 불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스님은 6·25의 전화(戰火)로 폐허가 된 월정사를 지금의 훌륭한 도량으로
    중흥시켰다. “마음에 생사가 없다.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구멍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다.
    본디 마음이 나온 것이 없음을 확연히 갈파한 것을 도통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 나온 구멍이 있는지. 따라서 나온 구멍이 없으므로 죽는 구멍도 없다.”
 
    스님은 망상에 집착하는 중생들에게 경책을 주는 법문을 했다. “우리의 삶은 간밤에 꿈꾸고 자는 것이나 같이
    생각한다고 할까. 간밤 꿈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선 무언가 분명히 있었긴 있었으나
    헛것이든    그렇게 삶을 본다.”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가 추서하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아
    스님에 대한 흠모가 불교계를 넘어섰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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