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45호 부석사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

창포49 2010. 5. 16. 01:00

 

 

국보   45호
명   칭   부석사소조여래좌상
  (浮石寺塑造如來坐像)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 부석사 

 

 

 

             義湘祖師 法性偈 (의상조사 법성게)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오묘하고 원만한법 둘이 없나니 

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 본바탕 고요하고 산같은 진리 

無名無相絶一切(무명무상절일체) 이름과 모양 모두 없나니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여경) 알음알이 누가있어 증명할거나 

眞性甚深極微妙(진성심심극미묘) 깊고도 현묘할손 진리의 성품 

不守自性隨緣成(불수자성수연성) 내 성품 못벗으면 인연따라 이루네 

中一切多中一(일중일체다중일) 하나에 모두있고 많은데 하나있어 

一卽一切多卽一(일즉일체다즉일) 하나 곧 모두이고 모두 곧 하나이니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시방) 한 티클 작은속에 세계를 먹음고 

一切塵中亦如是(일체진중역여시) 낱낱의 티클마다 세계가 다 들었네 

無量遠劫卽一念(무량원겁즉일념) 한없는 긴 시간이 한 생각 찰나이고 

一念卽是無量劫(일념즉시무량겁)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긴 겁이니 

九世十世互相卽(구세십세호상즉) 가없는 넓은세계 엉킨듯 한덩이요 

不雜亂隔別成(잉불잡란격별성) 그러나 따로따로 뚜렷한 만상일세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 처음 내킨 그마음이 부처를 이룬때고 

生死涅槃相共和(생사열반상공화) 생사의 열반의 본바탕이 한경계니 

理事冥然無分別(이사명연무분별) 있는듯 이사분별 혼연히 없는 그 곳 

佛普賢大人境(십불보현대인경) 시방제불 나투신 부사의 경계로세 

能仁海印三昧中(능인해인삼매중) 부처님 해인삼매 그 속에 나툼이여 

繁出如意不思議(번출여의부사의) 쏟아 놓은 부처님 뜻 그 속에 부사의여 

雨寶益生滿虛空(우보익생만허공) 이로운법 의미는 허공에 가득하여 

衆生隨器得利益(중생수기득이익) 제나름 중생들로 온갖 원 얻게 하네 

是故行者還本際(시고행자환본제) 행자가 고향으로 깨달아 돌아가면 

파息妄想必不得(파식망상필부득) 망상을 안 쉬려도 안 쉴 길 바이없네 

無緣善巧捉如意(무연선교척여의) 무연의 방편으로 여의보 찾았으니 

歸家隨分得資量(귀가수분득자량) 자기의 생각대로 재산이 풍족하네 

以다羅尼無盡寶(이다라니무진보) 다라니 무진보배 끝없이 쓰고 또 써서 

裝嚴法界實寶澱(장엄법계실보전) 불국도 법왕궁을 여실히 꾸미고서 

窮坐實際中道床(궁좌실제중도상) 중도의 해탈좌에 그윽히 앉았으니 

구來不動名爲佛(구래부동명위불) 옛날 부터 동함없이 그 이름이 부처일세

 

 

             義湘祖師의상스님 (625-702)

 

              화엄종 시조이다.
              속성은 김 씨며 스무 살에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여 낙발하였다.
              원효스님하고 같이 당나라 중국으로 유학을 가다가 원효스님은 중간에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다시 돌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은 신라 승으로서 당나라에 유학한 유학승이다.
              문무왕 1년 661년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배편으로 당나라에 유학했다. 중국 종남산 至相寺 智嚴화상으로부터

              현수스님과 함께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현수는 중국 화엄학의 3조가 되고 의상은 670년 문무왕 10년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낙산사 와서 백일기도 후 왕의 부름을 받아서 지금의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의 종주가 되었다.
              현수는 화엄경의 강술하여 의상에게 보냈다. 그리고 편지에 자신이 쓴 강의 내용을 냉철히 비판하여 줄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의상대사 10대 제자.
              오진(五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량원(量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법성게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가 유명하다.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이라 할 수 있다.

              스님은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立法界品抄記),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