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순례

국보 95호 청자칠보투각향로(靑磁七寶透刻香爐)

창포49 2010. 6. 27. 22:20

 

 

국보   95호
명   칭   청자칠보투각향로
  (靑磁七寶透刻香爐)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전기의 청자 향로로, 높이 15.3㎝, 대좌지름 11.2㎝의 크기이며 뚜껑과 몸통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은 향이 피어올라 퍼지도록 뚫어서 장식한 구형(球刑) 부분과 그 밑에 받침 부분으로 되어 있다.

구형 부분 곳곳의 교차 지점에는 흰 점이 하나씩 장식되어 있다. 몸통은 두 부분으로 윗부분은 둥근 화로 형태인데, 몇 겹의 국화잎으로 싸여있고 다시 커다란 국화잎이 이를 받치고 있다. 아래 부분은 향로 몸체를 받치고 있는 대좌로, 3 마리의 토끼가 등으로 떠받들고 있다. 대좌의 옆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토끼의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나타냈다. 유약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광택이 난다.

이 작품은
상감청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 청자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적인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 있는 뛰어난 청자 향로이다.

 

 

 

상감청자象嵌靑瓷
한국은 옛부터 고도로 도자기 문화가 발전한 나라 중에 하나로, 때로는 외국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문화를 외국에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성장한다. 
고려의 청자 기법은 우리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손꼽히는데 그중에서도 상감청자는 그 으뜸으로 친다. 

그러면 이제부터 상감청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상감기법이란 청자의 태토 위에 음각무늬를 새기고 그 새겨진 각흔 안을 자토나 태토로 메워 놓은 다음 시유해서 구워내면 자토는 흑색으로, 백토는 백색으로 발색되는 것이다.
이런 기법은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잔손질이 많아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잘못하면 문양이 녹아서 유약에 흡수되고 반대로 유면에 빙렬(갈라진 얼음의 금 모양의 무늬)이 너무 많이 생기거나 터지는 경우가 있어서 역대로 도자기에 상감한 예는 거의 없었다. 

고려 청자는 인종 연간에 은은한 비색의 아름다움과 함께 예리한 기품이 있으면서 부분적으로 유연한 선을 지닌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곧 그 절정기에 오르는데, 청자의 유색은 곱고 반투명한 비취색으로 은은한 가운데 맑은 맛을 풍기며, 그릇 모양은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1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 청자는 상감기법을 사용하면서 다시 한번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청자상감은 그 실례가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10세기 후반경에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때에는 아주 단순 소박한 문양이었고, 11세기에는 상감기법이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그 기법이 아직 거칠고 문양 효과도 두드러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미 음각, 양각문양과 병행하여 각 문양 구성원 중에 종속문으로 등장하거나 절지문 형식의 단독문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데, 이미 그 기술이 숙련되고 문양 효과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반적인 음각문이나 양각문을 주문양으로 하고 매우 제한된 어느 부분에만 종속문으로 약간의 상감을 넣었던 것이 특색이다. 

12세기 전반기는 처음으로 상감이 일반화되는 시기이다. 처음의 상감문양은 그릇의 안과 밖 일부에 나타나다가 점차 전면에 나타게 되었고, 좀더 발전되어 내외면에까지 확대되게 되었다. 문양은 상감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그림으로 그린 양식)되기 시작하는데,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과 종속문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새롭게 고안된 여러가지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12세기 중엽부터 후반기에는 상감청자의 전성기로, 고려 도자기는 상감청자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발전되게 되어, 이 기간 중에 상감법이 다양화되었다. 청자의 유약은 더 맑고 투명해지면서 유면에 빙렬이 생기고, 그릇의 표면은 은근한 양감이 있는 가운데 부드럽고 유려한 형태로 변모하였다. 

상감 의장무늬는 12세기 전반기에 양인각문양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운학문 등의 단독 문양과 모란, 국화절지 등 절지문양, 사실적이면서 회화적인 모란당초문 등이 상감으로 시문되어 세련화되었다. 문양 구성에 있어서는 주문양과 종속 문양이 같이 등장하여 적재적소에 따로 시문되면서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대접과 바라기 같은 그릇에는 안팎면에 모두 문양이 등장하여 균형을 잡았다. 문양은 12세기 전반기의 사실적이고 회화적인 것에서 점차 양식화, 도식화되었지만 자연의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살린 채 공예 의장으로서 높은 품격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상감 기법이 다양화됨에 따라 투시 효과를 신경쓰게되어 투명한 청자유를 선호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투명도의 추구는 빙렬이 유면 전체에 분포되는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에는 상감 기법에서 다양성과 세련성을 보여준 국보로 지정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대접과 청자상감절지문대이 있는데, 이들은 상감청자의 편년 자료로서 귀중한 유물이다. 두 가지 모두 유약의 투명도가 높고 맑은 비색이며 주문양과 종속 문양의 포치가 짜임새있고 아름다워 상감청자의 전성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상감청자의 마지막 전성시대라고 볼 수 있는 13세기 초반에는 그 기본 골격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으나, 상감의 문양은 더욱 도식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청자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유약의 청아도에 변조가 나타나서 유약이 좀 두껍고 그 색택(빛나는 윤기)이 좀 진해졌으며 문양의 단위가 작아지며 과밀화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도식화되어 산만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기형에서 오는 곡선이나 상감 의장에서 볼 수 있던 유연하고 유려하였던 선율적인 아름다움이 차차 양식화되고 도식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한국은 중국 등 이웃나라와의 문화교류를 통해 문화 발전에 활용하였으나, 우리에게 들어온 외래 문화를 우리문화에 접목 수용하면서 자신과 주관이 뚜렷하여 우리의 문화 의식이나 미의식과 조형 의식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도자기 상감문양 기법은 고려 사람의 창의에 의한 미의식의 발현으로서,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외국의 문화를 자기에게 맞는 문화로 변화시켜 사용할 줄 알았던 선조들의 실험정신과 독창성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김남조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에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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