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오치균과 봄

창포49 2012. 2. 25. 11:48

 

 

 

 

 

 

 

 

 

오치균

 

 

그림 / 오치균

 

나는 나에게

가끔은

손님이고 싶어한다

 

살아온 날들을

남처럼

보고 싶어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보여주는 것이

보여지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 때로

너무 아름다이

보였을 때

그에게는 그러했는가

 

 

 

自我...

그는

나에게

가장 가깝고

두려운 손님이었다

 

그가

떠나고 싶어할 때가

가장 두려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손님을

들이지 않았다

 

내 정원의 꽃들이

흔들리고 있다

 

이름을 잊고

다른 빛깔을

옷입기도 한다

 

 

 

 

그래서

좋을 때도

가끔은 있다

 

손님없는

마음대로 정원

주인만 있는 정원

 

꽃들도

마음대로

자태를 흐트러뜨리고

 

나도

마음대로

어질러 놓으면서

 

시간이 지나니

엉망이 되기 시작하는

나의 xanadu

 

잡초만 무성하고

쓰레기가 생겨났다

 

 

 

 

다시

그 손님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그를 다시

불러내려하니

 

그가

보이지 않는다

 

찾아 다니다

그를 찾았다

 

그리고 놀란 건

내가 그림자없이

살고 있었다는 것

 

 

 

 

 

그는

슬피 울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

얼른

내게 그림자가

되어주었다

 

그와 나는

더이상

주인과 손님이 아니다

 

그와 나는

하나이고

나는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정원은

나만의 꽃들을

자신있게 피워냈다

 

그리고

나는

고요하다

 

한없이

고요하다

 

 

Y

 

 

 

1956
2 월 10일 충남 대덕군 반석리 (지금은 대전시 반석동 )에서 아버지 오희철씨와 어머니 박태임씨 사이에 10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

1964-69
외삼 국민학교 졸업. 국민학교 시절 그림을 좋아해 방학 숙제 이상으로 그림을 그려낸 기억은 있지만, 그 흔한 미술대회 상 한번 받지 못해 본인 스스로도 재능이 특별하다 여긴 적이 없다. 공부는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해 늘 1등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이었다. 몸이 허약하고 사교성이 없어 놀자고 찾아오는 친구도 마다하고 집안에 틀어 박혀 공상을 즐겼다.

1969
유성 중학교 . 충남 고등학교 졸업 . 중학교 때부터 미술반에 들어 취미로 나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 다소 재능이 눈에 띄었던지 고교 때는 미술 선생님이 미술반에 들기를 권유하였다

1975
우수한 학과 성적을 믿고 의대에 지원하였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재수 중 뚜렷한 이유는 없으나 운명적으로 미대 진학을 결정하였다. 훗날 생각 해 봐도 이 드라마틱한 진로의 전환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여겨진다. 시골 출신으로 거의 입시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서울 미대에 응시하여 덜컥 합격하였다. 시골 분이셨던 부모님은 서울대는 자랑스러워하셨지만 ‘화가’가 되는 것은 별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76-8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뒤늦게 시작한 그림이 너무 좋아서 열심히 많이 그렸다. 스스로는 나만큼 그리는 사람도 없다는 강한 자부심 이면에 변변한 미술 교육의 밑받침도 없는 시골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와 권위적인 교수들의 무관심 속에서 소외감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머리도 빡빡 밀어보고, 요란한 복장으로 몸부림을 쳐 봤지만, 늘 불만이 가득했다. 미술사적 지식이 빈약하여 서양대가들의 영향을 깊게 받지 못했지만 고야, 렘브란트, 자코메티, 고흐, 잭슨 폴락, 프로이드, 특히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좋아하였다.

1980-82
ROTC로 경기도 포천에서 군복무를 하였는데, 매우 고된 기간이었다.

1982-85
재대 후 화실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유학을 준비하였다. 1984년 2월 10일 화가인 이명순과 결혼하였다


1985
첫 번째 개인전. 유학을 떠나기 전 서울 종로구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열었다. 대형 캔버스에 돌고래, 코끼리 등 역동적인 이미지들을 덕지덕지 유화물감으로 두텁게 바른 작업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 투지 등의 발산이었다.

1986
뉴욕 브루클린 컬리지 대학원에 입학. 한국과 전혀 다른 미국대학의 풍토에 크게 고무되었다. 전혀 선입견 없이 작품 자체의 독창성과 가능성 만으로의 평가로 대학원 실기 장학금의 Charles G. Shaw Scholorship Award를 87년 88년 연속으로 수상하는 등 큰 용기를 주었다.

1987
뉴욕에서의 첫 개인전. 작품 슬라이드를 만들어 화랑을 돌아다닌 결과 소호에 있는 핀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게 되었다. 비록 순수 상업 화랑도 아닌 회원제로 운영되는 코-압 갤러리였지만 세계미술의 중심인 뉴욕, 소호 무대에 그림을 걸었다는 자긍심에 뿌듯하였다..

1988
핀다 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 어두컴컴한 실내에 홀로 켜진 TV, 형광 빛 인공조명에 비춰져 드러난 앙상한 인체, 뉴욕 지하철 속의 거지, 어둡고 차가운 지하 세계의 회색 풍경을 그렸다. 외롭고 힘든 외국생활이 그래도 반영된 그림들이었다.

1988
뉴욕 브루클린 대학 대학원 졸업. 석사학위 취득.

1990
전문 상업화랑인 C&A 갤러리에서 초대전.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90
뉴욕 시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화랑인 BACA 다운타운 갤러리에서 개인적. 슬라이드 심사를 거쳐 얻게 된 이 전시에는 모노로그 시리즈와 홈리스 시리즈를 통해 현대인의 지치고 고통스러운 삶을 표현했는데 NEW YORK TIMES와 NEW YORK OBSERVER의 ART REVIEW를 받았다.
1992
가나화랑 개인전. 가나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고 활발한 활동을 하며 경제적 안정도 얻었다. 세검정, 무악 재, 절두 산, 현저동 등 당시 서울의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그렸다. 또 연필, 파스텔로 집에서 기르던 개, 부암동 골목, 철거 중이던 현저동 모습 등을 그렸다.

1992
뉴욕 The Gallery There Zero 화랑에서의 개인전. 개인전 준비 차 다시 뉴욕으로 갔다. 맨하탄 다운타운에 작업실을 정하고 뉴욕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과 전혀 다르게 뉴욕풍경이 비쳐졌다. 초고층 빌딩 숲이 만들어 내는 기하학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커다랗게 연필 드로잉 작업도 했다.

1993
딸 진이가 태어났다. 어렵게 태어난 딸이 염려되어 예정보다 더 머물기로 했다.

1993
FIAC 아트 페어에 참가하였다.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며 파리 시내 풍경을 그렸다. 파리는 뉴욕과 달리 아담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도시였다.

1994
뉴욕 57번가 마리사 델 레 화랑에서 개인전, 월드트레이드 센터에서 내려다 본 맨하탄 풍경, 이스트 빌리지, 소호 등을 그렸다. 광활하고 대담한 뉴욕의 이미지를 그대로 떠내고 싶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파노라마의 빌딩 군으로 뉴욕을 표현했다.

1995
가나화랑 개인전. 뉴욕에서의 생활이 안정되고 익숙해지면서 맨하탄 구석구석 정감 어린 풍경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중엔 예전에 그렸던 홈리스들도 있지만 까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출근길의 맨하탄 거리 등 마천루의 숲 속에 존재하는 평범한 현대인의 군상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미국 앤틱 액자 또는 오래된 문짝 등을 작품의 일부인 오브제로서 도입해 활용하기도 했다.

1995
부산 공간 화랑에서 개인전을 했다.

1995
뉴 멕시코 주 산타페로 이사하였다. 산타페는 사막 한가운데 고원지대에 펼쳐진 찬란한 빛을 가진 도시이다. 그 곳에선 꽃 한 송이, 구름 한 조각도 황홀한 빛을 발한다. 인디언의 땅을 스페인과 미국이 통치하면서 유럽문화와 토속 인디언 문화가 혼합되고 사막과 협곡의 대자연이 천연 그대로 남아 독특한 매력을 가진 곳이다. 뉴욕이 시멘트의 회색 도시인데 비해 산타페는 마른 흙의 황토 빛 도시이다. 수 많은 미국 서부영화의 배경장소가 되기도 했고 화가 죠지 오키프가 산타페 근처 야비큐에 화실을 장만해 말년을 보냈다.

1996
뉴욕 마리사 텔 레 화랑에서 개인전.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던 해의 뉴욕을 그린 그림들이다. 겨우내 눈에 덮인 뉴욕은 자연의 모습이었다. 눈발 속의 자동차 불빛은 생존을 위한 동물의 눈이다.

1997
가나화랑 개인전. 산타페를 끝으로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다. 뉴욕 풍경, 설경, 산타페의 설경들 중 일부를 모아 전시하였다.

1998
4개 도시 순회전 - 부산 공간화랑, 대구 맥향화랑, 광주 신세계화랑, 인천 신세계화랑, 홈리스 시리즈부터 뉴욕, 산타페 등 10여 년의 작품을 모아 여러 도시에서 전시를 가졌다.

2002
가나화랑 인사이트 갤러리 개인전. 사북을 소재로 한 작품전 이었다. 사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늘 그렇듯 생각하고 떠난 길이 아니었다. 우연히 TV를 보다가 산나물 장이 정선에 선다길래 강원도에 갔다. 간 김에 태백 사는 작가 황재형을 만나러 가던 길에 우연히 본 사북마을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나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싶은 강렬한 욕구로 여러 차례 그곳을 방문하여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나중에 보니 그곳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사북이었다. 슬픈 과거사와 새로운 변신으로의 진행이 산타페와 많이 닮았다.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지역 특성도 그렇고 사북에서 보는 꽃, 하늘, 구름, 페인트 색도 산타페의 그것들처럼 많고 눈부시다. 산타페의 황토색이 사북에선 검은 탄 색이다.

2003
광주 신세계 화랑 개인전. 사북 그림으로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2003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초대 개인전. 나는 유난히 겨울을 보내는데 애를 먹는다. 추운 것이 싫다. 겨을내내 봄을 기다리다 처음으로 봄 소식이 들리면 그 곳을 찾아간다. 아직도 추운 겨울인데 슬며시 피는 산수유, 얼음장을 뚫고 나온 듯 야무진 매화에서 난 봄을 맞는다.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조금만 이르거나 늦으면 보여지지 않는 삶의 희망-봄 꽃들… 봄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 만으로 기획된 전시이다. 이른 봄에 새로 문을 연 갤러리 아트 링크의 개관전이기도 하다.

2003
대구 맥향화랑에서 이명순과 2인전

2003
03 ‘감’전. 갤러리 아트링크
1998년부터 그려오던 시골풍경 중 감, 감나무가 들어간 작품만을 모아 전시.
강원도 깊은 산골, 까치도 먹지 않는 다닥다닥 붙은 토종 감나무, 곶감이 매달린 시골집 툇마루, 청명한 가을하늘을 이고 있는 단풍 든 가을 감나무가 정답다.

2003
‘파스텔’작품전. 갤러리 아트링크
탄 가루로 뒤덮인 검정색 도시 사북. 사막으로 둘러싸인 황토색 마을 산타페, 이 두 곳을 그린 파스텔 작품 50여 점을 전시. 사북에선 내 어린 시절 보았던 담장 아래 민들레, 처마보다 큰 키의 해바라기, 시골집 안방 같은 정경에 시선이 끌렸고, 1996년 일년 남짓 머물렀던 산타페에선 변화무쌍한 하늘, 표정이 다른 창문들, 인디언교회 등에 눈길이 갔다.

2005. 2
부산 도시 갤러리 개인전
도시 갤러리 관장 이혜경이 선택한 30여 점-뉴욕 시기의 작품,사북,산타페 그림, 파스텔 화 등을 전시하였다

2006. 3
부산 도시 갤러리 개인전
산타페를 그린150여 작품 중 최근작 30여 점과 변화무쌍한 산타페의 하늘을 그린 파스텔화 10여 점 전시. 1996년도 산타페 작품에 비해 최근작은 사물이 구체적이면서 강렬한 원색 조의 그림이다

2006. 4.
“Windows"전 갤러리 아트링크
1986년 내가 살던 부르클린의 아파트 창밖, 붉은 벽돌 사이로 이웃집 창문들이 보였다. 외로움을 달래 주기도 했고 향수병을 더 자극하기도 했던 그 창문들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창문들을 그려왔다. 뉴욕 할렘가의 깨진 창문, 자취방을 생각나게 했던 사북의 창문들, 수채화 물감이 번진 듯 빛을 드리우고 있던 산타페의 창문들. 홈페이지를 오픈하면서 창문을 소재로 한 20여점을 선정해 전시를 구성했다.
디지털 windows와 나의 windows 와의 만남이다.

2007.9
갤러리현대 개인전.
진달래와 사북의 겨울을 그린 작품 40여점을 전시하였다.
겨울의 끝에서 만난 있는 듯 없는 듯 그래서 더 반가운 진달래.
이제는 급속한 지역개발에 밀려 빛바랜 추억처럼 소외된 옛 사북, 그곳에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왔다.
우리 야산에 핀 진달래와 옛 사북의 겨울은 유난히 말이 없다.

2007.12
파스텔전 갤러리 H.
1997년과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작업한 30여 점의 파스텔 작품을 전시.
수채화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타페의 하늘과 사북의 겨울은 신비롭다.

 

2008
뉴욕 첼시 미술관에서 "풍경의 정의"라는 제목으로 뉴욕, 사북, 산타페를 그린 풍경과 파스텔화등 50여점 전시.

 

2009
갤러리현대 개인전
"소외된 인간"


 

 

 

 

 

 

 

 

 

 

 

 

 

 

 

 

 

 

 

 

 

 

 

 

 

 

 

 

 

 

 

 

 

 

 

 

 

 

 

 

 

 

 

 

 

 

 

 

 

 

 

 

 

 

 

 

 

 

 

 

 

 

 

 

 

 

 

 

그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열정이 많은 화가이다.

거의 돈키호테처럼...

그림에 돌진하는 투우처럼...

 

실제로 코끼리...라는 그림에서처럼

그는 삶에서도 화폭에서도

돌진하는 화가인 것 같다

 

삶을 관조하는 유형도 있지만

그는 인생에서 자신이 발견한 어떤 것들이

오브제가 되어 넘어갈 장애물처럼

본능적으로 뚫고 나가는 사람 같다.

 

그래서인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아닌

현실적인 그에게

현실은 하나의 그림으로 변모한다.

 

우연히 사북을 발견한 그에게

잠도 못자고 달려갈 정도로

뭔가 가슴을 두드리는...

사북은 그에게 절실한 인생들의 역사가

담긴 풍경...

 

가슴의 안테나가 그에게 느끼게해주는

풍경에 담긴 슬픔의 색채랄까...

그는 그것을 감지해내고

힘차게 담아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슬퍼진다고 하던 그...

어느 동영상에서 본

억새밭인지 풀밭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왜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 옷을 다 벗고 싶지...

하며 훌훌 벗고 달리던 그...

 

그는 자유인이다.

자신이 있는 어느 지점에서도

어떤 가감도 없이...

합리화나 미화도 없이...

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치균으로 부딪혀

하나의 작품속에 담아낸다.

 

 

Y

 

 

 

 

 

 

 

 

 

 

 

 

 

 

 

 

 

 

 

 

 

 

 

 

 

 

 

 

 

 

 

 

 

 

 

 

 

 

 

 

 

 

 

 

 

 

 

 

 

 

 

 

 

 

 

 

 

 

 

 

 

 

 

 

 

 

 

 

 

 

 

 

 

http://www.ohchigyun.com/

 

 

 

 

계곡마을 / Acrylic on Canvas 112 x 162 1999

 

 

파란집 노란집 / Acrylic on Canvas 70 x 70 2000

 

할머니 / Acrylic on Canvas 100 x 80 2000

 

집으로 / Acrylic on Canvas 87 x 130 1999

 

고한읍골목 / Acrylic on Canvas 80 x 80 1999

 

삼거리 가게집 / Acrylic on Canvas 67.5 x 100 2001

 

퍼런벽돌 / Acrylic on Canvas 116.5 x 78 2001

 

 

 

 

우리가 여태껏 보아오던 오치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계절감은 겨울이다.

그의 그림에서 겨울과 상대되는 봄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따뜻한 계절감이 드는 그림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치균의 그림 하면 떠 오르는 느낌은 눈이 무지막지하게 내려

힘겨워 하는 사람이나 자동차가 보이는 혹독한 겨울, 그것이었다.

두텁게 발라 올린 화면 질감과도 잘 어울렸다고 여겨지는 이런 분위기는

오치균의 그림이 우리에게 처음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10년 남짓 동안

그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품는 느낌일 것이다.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발표되었으니 만큼 강하게 각인된 면모이다.


그런 그림쟁이 오치균이 봄을 그림 그림들로 전람회를 가진다고 하면

좀은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화 풍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다루는 방법에서 신선함을 유지하던 오치균이

드디어 봄 같은 상투적인 것을 제대로 삼게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어두운 분위기를 떨치고 밝음을 찾아간다는 점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었더라도 살아있기만 한다면

봄은 멀지 않은 것이 아닌가?

겨울을 이겨내고 맞는 봄!

오치균이 봄 그림을 그렸다고 했을 때,

나에게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세계, 그리고 오랫동안 춥고 쓰라린 겨울을 겪고,

그리고는 드디어 겨울을 이겨냈다!

이렇게 봄을 맞는 다면 그 봄은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오치균이 선보일 봄 그림에는 분명 남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가졌던 유토피아적인 바람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어느덧 디스토피아적인 불안으로 바뀌었다.

오치균은 사실 겨울 분위기를 자주 다루었던 점 때문에라도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이 강했던 화가다.

그런 그가 다른 길을 가는 것인가?

 

지난 2002년에 열린 사북 그림 전에는

봄이나 여름의 사북을 그린 그림이 꽤 눈에 뜨였다.
사북 하면 떠오르는 어둡고 칙칙한 느낌과 달리 조금은 밝고 환한 느낌이었다.
민들레가 있는 풍경과 해바라기가 등장하는 그림이 꽤 있었다.

 

오치균이 사북에 눈길을 맞추고 이를 그리기 시작한 때는 1999년이다.

내 짐작으로 그 해 봄부터 사북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겨울 분위기 속에서 봄을 이미 보았다.

사북을 그리기 시작한 첫 해에 해바라기가 등장하고,

계곡마을의 봄을 그린 것이 있었다.

그는 겨울 느낌 그 자체로도 여겨지는 사북을

겨울로 보다는 봄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석탄 캐기로 흥성하던 곳이 이제는 사람마저 떠나 비다시피 했다.

사람이 없어지자 살아나는 자연을 그는 그리고 싶었을까?

사북 그림 전을 열면서 낸 그림모음에 스스로 쓴 작품설명을 보면

그가 봄 그림을 느끼도록 그리게 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 계곡마을에도 봄은 찾아와 겨우내 덮었던 눈을 녹여 주니

폐허 같은 마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봄은 역시 잔인하다....” (계곡마을-봄 , 1999)

 

겨울, 특히 눈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오치균의 생각은 매우 다르다.
자신의 생활 감각으로는 눈이 징글하단다. 시골 태생으로 자라났고,

군대에 징발되어 생활하면서 그는 눈을 아름답다느니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봄 역시 ‘잔인하다’고 표현했다.

이런 인식에, 이런 실감이 없다시피 한 나도, 듣고 보면 동의할 수 있다.

그래, 상투화된 감각은 멀리 던져라.

 

“... 폐허 속에서 홀연히 핀 봄꽃은 가히 신성하기까지 하다.

언제 봐도 흥분되는 그리고 싶은 소재다. ” (봄소식, 2000)

 

남다르게 봄을 그리워하면서, 봄을 그리는 그의 마음은

다음 진술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난 유독 화분에 담긴 화초를 좋아한다.

어려웠던 시절에도 새 화초를 키우며 행복을 느꼈다...

단칸방 뒤엉킨 살림이었건만 화분을 정성스레 가꾸는,

인간은 참으로 가엽도록 나약한 것 같다.

그러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허름한 담 벽 아래 화분도 아닌 아무런 그릇들 속에

가난한 주인의 손길로 소박하게 자라고 있는 화초들이!” (화분, 2000)

 

이런 진술 속에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애써 이를 승화하는 심정,

곧 겨울 속에서 봄을 보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겨울 속에서, 겨울을 사무치도록 맛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욱 애타게 봄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겨울을 호되게 겪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그는 이번에 선보일 그림에 대하여 붙인 글에서 그런 태도를 보인다.

 

“수도가 옆 한 그루 개나리가 아름답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봄 햇살이 감싸준 공기를 표현하려 애썼다.

찬 기운은 완전히 없어진 정오,

아직 초록은 뒤덮이지 않았지만 완연한 봄이다.” (고향집, 2000)

 

“작업실 가는 길, 갈마 터널 지나 오른쪽 창밖을 보면

어릴 적 살던 고향 닮은 동네가 나온다.

이른 봄이면 밭 중앙에서 활짝 핀 목련 덩이가 나를 반겼다...” (목련, 2000)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처음 오치균의 화실을 방문했고,

제대로 된 인사를 처음으로 나누었다.

그의 그림을 열심히 보았지만 인사는 스쳐 나는 정도로 그쳤던 것이었다.

깡말랐던 인상에서 살쪄 보이고, 더욱이 근육질로까지 보이게 변한 것처럼,

늘 겨울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고 여겨지던 그의 입에서 나온

봄에 대한 생각은 내 흥미를 자극했다.

나는 어느 때,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수년 동안 불안해했던 적이 있었다.

한겨울, 추위와 끝도 없이 오가는 자동차의 매연과

시끄러운 소리에 시달리는 나무들,

뿌리 내린 땅조차 단단한 껍질로 싸여 끝내는 목말라 죽은 것일까?

끝을 꺽으면 맥없이 부러지는 겨울의 나뭇가지는 마치 죽은 모습이다.

워낙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나는 안심하지 못한다.

봄이 오지 않으면, 침묵이 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아직 따른다.


오치균에게서도 이런 느낌을 겪었노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

런 그를 보고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불안 속에 맞고 했던 봄이야말로 실로,

나를 미치게 했다고 할까,

나는 누구보다도 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어렸을 때는 봄마다 맥이 풀렸고,

눈이 너무 부셨기 때문에 봄이 싫다는 느낌을 가졌다.

봄만 되면 나는 늘 어머니의 손에 끌려 병원이나 한약방으로 다녔다.

성장하여 이런 상태가 극복되자 나에게는 봄이 반갑고,

새롭고, 신나는 계절이 되었다.


구한말이라고 흔히 말하는 옛 대한제국 시절,

이 땅을 방문한 먼 나라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봄을 맞아

이 땅에서 피는 꽃이 매우 아름다운 것과 가짓수 많은 것을 예찬했다.

이런 진술을 보면서 이 땅의 봄의 남다름을 실감했다.

자라면서 건강을 되찾은 내가 신나 하는 것이 당연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까만 동네이다.

생명이 담겨 있을 법 하지 않은 거친 담벽들 사이로

힘차게 개나리가 피어올랐다.” (개나리, 2001)

 

“겨울 끝, 살포시 봄은 찾아온다.

한없이 적막했던 마을에 봉고 트럭이 들어왔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철죽꽃 아래

술렁술렁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봄소식, 2001)

 

“보송보송 털이 난 조그만 고양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앙증맞게 피어 있는 민들레...” (민들레, 2001)

“... 창문 아래 노란 민들레, 주인 없는 창 아래 홀로 피었다. ...

빨리 봄 산으로 다가가고 싶다.” (돌아가는 길, 2001)

 

사북을 그리면서도 뱉은 이 말들에서 우리는 오치균이

곧 봄의 전령사로 발벗고 나설 것임을 물씬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는 봄을 왕성하게 그려냈다.

화실을 방문한 나에게 그 동안 준비했던 그림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오치균은 그림 그리기에 정말 열심이다! 봄 대지의 생산력 처럼.’

 

우리가 느끼는 계절에 대한 느낌은 온전한 것일까?

이 엉뚱해 보이는 의문은 아무리 자명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온당하다.

누가 봄을 제대로 그렸는가?

안견이 그런 꿈속에서 본 복숭아밭 그림을 우리는 안다.

김홍도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그림에 봄이 오는 강물 위에

언덕 위 난 나뭇가지에 돋는 순을 보는 사람을 그린 것이 있다.

김홍도 특유의 봄 느낌을 물씬 풍기니, 노래로 치면 절창이다.

박수근이 그린 봄 그림도 봄의 느낌이 물씬 하다.

박수근 특유의 겨울 느낌을 주는 소재와 화면을 거쳐

그가 도달한 봄 느낌은 남다른 바가 있다.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린 봄 그림이 존재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아무리 좋은들 뭐하나?

이것들은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봄을 그린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느끼는 봄은 아직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젖먹이와 어린이, 소녀, 소년,

청춘 남녀, 신혼의 남자와 여자, 중년 남녀와

인생의 황혼을 맞은 노인들이 느끼는 봄,

버려진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더미 사이에서

싹트는 싹이 있는 봄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가난뱅이 젊은이의

봄 느낌은 그려지지 않았다.

가까이 100년 이상 이어진 진저리 처지는 곤란을 거치고 있는

우리들의 느끼는 봄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수만 점의 봄을 제각기 달리 그렸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다른 봄 그림이 기대된다.

여지가 아직, 너무나 많은 것이다.

 

이런 느낌을 그려 남기는 일은 아직 제대로 시도조차 되지 않았건만,

우리들은 다른 세계를 그리워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가장 흔한 소리가 이런 것은 인상파 화가들이 다했다.

서양 사람들이 다했다는 종류의 말이다.

과연 그럴까? 과연 다해 놓아서 할 일이 없는 것일까?

 

우리가 온전한 존재로 바로 서고자 했을 때,

우리를 둘러싼 갖가지 물상과 느낌에 대한 감각이 온전해야 한다.

한 가지의 사물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모두 다르지만

공감각을 바탕에 둔위에 제각기의 다른 감정을 허용한다.

오치균이 애써 이루려고 하는 바는 먼저 사물이다.

현상에 대해 의당 가질 만한 느낌을 나타내는 일이다.

이런 것 없이, 어찌 고등한 감각이 생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늘 든다.


그래서 박수근과 이중섭 같은 근대의 거장은 아직 사랑 받고 있다.

이들의 작업 바탕은 사랑이다.

대상이 사물이건 생물이건, 이 점에서 오치균의 작업은

시대착오적이기는 커녕,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백인백색, 천태만상의 변화를 통해서

리는 진실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오치균이 그리는 봄 풍경은 그러나,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더는 봄을 단지 아름답게만 그릴 수 없는 시대에 도달한 것 같다.

무조건적인 유토피아적인 전망은 존재할 곳이 더는 없다.

아름답다는 느낌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을 때

조화임을 알고 씁스레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무엇 인줄 알았는데,

확인해 보니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안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 국토도 이제 더는 금수강산이 아니다.

국토는 허리만 동강이 난 것이 아니다.

어부가 건져 오린 그물에는 물고기보다 비닐과

유리조각 같은 쓰레기가 더 많이 걸린다.

경치도 어느 한 곳 눈길 줄 곳이 드물다.

이 괴로운 시대에, 짐짓 꾸며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해 봤자 그것은 거짓이고, 사기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이런 사기극을 만들지 않는다.

 

오치균은 봄을 그리는 여느 그림 그리는 사람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우리주위, 망가져 황폐하기까지 한 풍경에 눈길을 주고,

손길을 주어서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그린 봄 그림을 보면 마치 그가

손으로 보듬으며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구도잡기는 어떤 명 너무나 곧이곧대로인 느낌이

강한 것도 많으며, 다소 쌩뚱맞은 것도 적지 않다.

이런 점으로 하여 이른바 현대적인 느낌을 자아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의 풍경은 결코 억지로 꾸민 풍경이 아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에서 자기가 마음줄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착시킨다. 이것이 오치균의 남다른, 중요한 점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대문부터 무너지더니 본채마저 돌보지 못해

내 고향집은 빈터로만 남아 있다.

보잘 것 없는 마을에 봄이 찾아와

꽃을 피워 주니 더욱 귀하다.” (고향 닮은 마을, 2001)

 

“... 자랄 새도 없이 잘려 나가는가 싶은데

그래도 살아남아 있던 가지가 꽃까지 피웠다.

거칠디 거친 나무 마디가 피운 꽃에

봄볕이 가득 하니 눈이 부시다.

그런 나뭇가지를 표현할 수 있을까...”(늘 잘리는 나무, 2002)

 

오치균을 비롯한 뛰어난 미술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그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위엄을 부여하는 일이 아닐까?

 

내게는 흡사 한 계열의 그림쟁이로 여겨지는 화가들이 있다.

밀레와 박수근 그리고 오치균이 그들이다.

이 이름들에 우리는 줄을 그으면 된다.

밀레와 박수근 사이에 반 고흐가 있지만 조금은 다르니 넘어가기로 하자.

 

밀레가 자신이 애써 두텁게 마련한 바탕을 통해서,

농부들, 더욱이 제 땅도 없이 가난하디 가난한

이삭 줍는 거렁뱅이 여인들에게까지 정성을 다한

물감 쌓아 올리기를 통해 부여하고자 한 것은 위엄이다.
그랬으므로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는 밀레처럼 되고자 한

박수근은 많게는 아홉 번이나 덧발라 가면서

질감 만들기를 자신의 목표인양 그토록 몰두했던 것이다.

오치균의 목표도 같을까? 나는 그렇다고 여긴다.

단 그 방법은 다르다는 것이고, 이 것은 매우 중요한 차별 점이다.

밀레가 밀레답게 그렸듯이, 박수근이 박수근답게 그렸듯이,

오치균은 오치균답게 그린다. 오치균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오치균스러운 것일까?

이 질문은 계속 열어두고 궁금해 하자.

 

아무튼 오치균은 존중할 만한 ‘그림쟁이’다.

 

오치균이 그려낸 봄은, 그의 다른 그림이 그렇듯

우리와 우리 주위의 것에 위엄을 부여하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 그는 우리의 봄에 위엄을 더하여 그려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봄 그림을 존중하지 못할 것이다.

 

“살짝 돋은 새싹은 희망의 미소이다.

아직 겨울의 죽음이 남아 있지만 이제 살았구나 기지개를 펴도 된다.

대세는 봄이며 새싹은 생의 징표이다.

특히 쓰레기 더미 속의 새싹은 더욱 귀하다.

고통스런 몸부림 끝에 아물어 가는 상처와 같다.

이런 대세는 통쾌하다.” (봄소식, 2001)

 

그의 봄 그림은 그러므로 대세다! 그의 봄 그림으로 하여

우리가 앞으로 맞는 봄은 더욱 풍요한 봄이 될 것이다.

 

최석태 | 미술평론인, 한국현대미술사연구가

가끔 화가 오치균의 소식이 궁금했다.

나는 2000년 가을, 한 선배의 개인전 뒤풀이 때 그를 잠시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작년 연말에는 나의 책<기도의 미술>을 그에게 우송했다. 이 책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컬렉션의 작품과 철학을 소개한 것인데, 오치균의 작품 두 점이 이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심 답례의 전화

한 통화쯤은 기대했지만, 메아리는 끝내 없었다. 그는 원래 그림 그리는 일, 작품 활동과 연관된 일

이외에는 세상 잡사와 거리를 두고 사는 칩거 형 작가다. 근자에 이러한 성향이 더욱 철저해진 걸까?

그 런데 올해 5월 중순에 가나화랑에서 연락이 왔다. 올 11월에 오치균 개인전 일정이 잡혀 있고, 전시에 곁들여 화집 출판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작가와 상의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1998년 봄 신세계 가나아트에서 개인전을 열고 5개 도시를 순회한 이후, 작품 발표가 전혀 없었던 오치균의 활동 재개 소식이 매우 기뻤다. 출판 협의에 곁들여 그의 근황을 알 수 있겠다는 가벼운 기대를 가졌다.

 

사북 가는 길

화집 제작을 논의한 것은 5월 말이었다. 화집 출판 문제는 일단 우리 출판사와는 조건이 맞지 않았다.

그 다음은 화집 내용의 조언으로 이어졌다. 그 중에 내가 던진 말이 “화가 자신의 솔직한 노트 같은 것을 싣는 게 좋겠다. 일반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직접 정리하기 힘들면 인터뷰를 통해서라도.”

기자가 그런 객관적인 중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내가 오치균 인터뷰를 잘 할 수 있다는 ‘입 방정’을

떨고 말았던 것이다. 이번에 오치균을 만난 것은 정확하게 이 인터뷰 때문이었다.

오치균은 베테랑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에 흥분(?)했고, 우리는 6월 초에 경기도 광주 작업실에서

만났다.

 

 

------- 이번 전시는 강원도 사북 그림만 소개해요.

랜만에 발표하는 전시 자체도 중요하지만, 화집 출판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죠.

사북 그림으로 화집을 만들려고 해요.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냐 하면, 최근 작가로서 내 생존 방식에 스스로 ‘신뢰’가 떨어졌어요.

작가 홍보는 화랑에서 맡아야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사정이 그렇지 못하죠.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 나를 대중 고객들에게 프리젠테이션 할 자료가 필요합니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내 그림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음 좋겠어요.

이거 가능성 있는 애기 아녜요?

또 처음 사북을 그릴 때는 그냥 자연스런 내 생각을 담는다는 생각이었지만, 책을 준비하다 보니까,

내가 변화하는 사북의 마지막 모습을 그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화집에 사북의 역사가 담기는 거죠.

쉽고 재미있는 책을 만들고 싶어요.

평론가는 화가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중간 매개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글이 너무 어려워요. 특히 내 그림은 그렇게 어려운 글로 쓰여질 이유가 없잖아요?

편안하게 읽히면서 내 그림을 소개할 수 있는 글을 김선생님께 부탁하고 싶어요.

 

 

 

아니, 웬 사북? 뉴욕과 서울의 풍경을 그려왔던 그가 이젠 시골 풍경으로 소재를 바꾼 것인가?

사북과 개인적인 연고가 있는가? 사북에 푹 빠진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사북. 사북은 탄광촌이 대명사가 아닌가? 과거 전국 무연탄의 절반을 공급하던 광산의 땅으로 명성을

날리던 곳. 가끔씩 지하 막장의 갱이 무너지는 대형 사고로 뉴스의 초점이 되긴 했지만, 사북은 수많은

입을 먹여 살리는, 한 시대를 풍미한 탄광 산업의 전초기지였다.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노동자가 몰려 80년대 중반까지 12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사북에 살고 있었다.

나는 사북의 아픈 역사를 떠올린다. 이른바 ‘사북사태’란 게 있었다. 80년대 초 군사 독재정권의 강압

정치가 서슬 푸른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 있던 시절, 사북 사태는 노조 결정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을 과잉 진압한 경찰과 여기에 대항하는 민초들이 서로 죽고 죽이려는 피의 싸움이었다.

결국 사북 지역의 비상 사태 선언과 무장 군부대의 진압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사 북의 회색 및 아픔의 현장이 아니라 푸른 빛 사랑과 야망의 무대로 등장한 적이 있다.

1990년대 후반 KBS 2TV에서 방영했던 주말연속극<젊은이의 양지>. 주인공들의 성장 무대가 바로

사북이었다. 이 드라마는 탄광촌 사북 출신 젊은이들이 서울로 진출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그렸다. 원치 않는 사건으로 헤어진 주인공 인범(이종원)과 차희(하희라)가 다시

만날 듯하면서 엇갈리는 고전적 사랑 이야기를 정석적인 멜로 드라마 형식과 강한 스토리 텔링으로

엮어냈다. 빈부.세대.계층의 격차를 모두 아우르는 이야기 전개는 폭넓은 시청자 군을 형성했다.

드라마 속의 젊은이들은 바로 이 사북의 음지를 딛고 꿈의 양지로 날개를 펼쳤다.

 

 

------- 사북…. 우연히 발견했어요.

미국에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니까 강원도 정선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어릴 때 사회 책에서 본 정선 5일장 얘기도 나오고.

그래. 와이프하고 정월 대보름 때 나물 먹으러 가자. 별 생각 없이 여행 떠나자고

지도를 보니까. 정선이 화가 황재형 씨가 살고 있는 태백하고 가까웠어요.

그때 태백을 지나다가 사북을 처음 보게 된 거죠.

정말, 난 그때 쇼크를 잊을 수 없어. 흥분해서 막 그림을 그렸죠.

환경 자체가 주는 충격이었죠.

사북의 첫 인상…… 온 세상이 새카맣다고나 할까?

그 후 계절마다 사북을 찾았죠.

미리 목표를 두고 그림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어요.

사북의 역사도 솔직히 잘 몰랐고.

난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포착한 내상에 정신을 완전히 맡겨버려요.

지금 생각하면 사북에서 ‘파란 삶’을 느꼈던 것 같아.

푸른 페인트, 요란한 커튼….”

 

 

회색 탄광촌에 타오르는 생명의 빛

오치균의 사북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대답은 참으로 싱겁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사북의 매력은 작가 자신의 눈에 포착된 하나의 소재 이상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애초부터 사북이라는 사이트(site)에 관심을 가졌는데…. 사이트? 단순한 장소(환경이나 땅)의 개념이 아니라 그 장소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적 맥락이 첨예하게 살아 있는 리얼리티의 장소 말이다.

핀트가 나갔나? 이걸 어쩌나….

사북. 오치균이 매료되었던 최근 3, 4년간의 사북은 어떠했는가? 나는 이 즈음의 사북 풍경을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여러 차례 목격한 적이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사북은 폐광이 늘어나면서 주민들이 속속 외지로 떠났다. 급기야 인구는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다. 번창했던 사북은 이제 희망이라곤 한 치도

보이지 않는 ‘버림받은 도시’로 쇠락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자에 쇠망해 가는 어둠의 도시 사북이

고원(高原)관광 휴양도시’로 새롭게 소생하고 있다. 석탄 가루 휘날리던 탄광촌이 강원 남부 지역에서

가장 활기찬 소비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변화의 핵심 동인은 카지노 산업. 카지노 효과로 사북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대형 룸살롱과

단란주점들이 1년여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여관. 모텔 등 고급 숙박업소도 잇달아 문을 열었다. 전당포도 성업 중이다. 폐광 촌이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나는 오치균과의 인터뷰를 위해 사북을 가야 했다. 사북 풍경. 사북의 사이트를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6월 13일. 오치균 부부와 나는 이른 아침 사북으로 향했다. 승용차로 편도 4시간 거리. 우리는

차 안에서 줄곧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물론 오치균이 이야기의 주인공 이었다.

부부.자식.친구.성.건강 등 40대면 누구나 안고 있는 일상의 삶에 대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야기의

귀결점이 되고 마는 예술(가)에 대해.

마침내 해발 650m의 험준한 산악지대 사북에 도착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서면 언제나 주변의 스카이라인에 황급히 눈을 돌리는 버릇이 있다. 나뿐만이 아닐 게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지점,

그 선이 그것보다 훨씬 높고 거칠었다. 놀라운 풍경 하나가 금방 눈에 꽂혔다. 지하에서 채광한

탄 부스러기가 수년 동안 쌓이고 싸여 실제 산보다 더 큰 산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이화원(?和園)에 펼쳐져 있는 인공 호수(차라리 바다에 가까운)와 비견되는 거대한 인공 산.

그것은 옛 탄광촌의 영광을 증언하는 사북의 기념비이리라.

사북은 역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읍 소재지 정도의 사이트가 빚어내는 기형적인 풍경이

어디 사북뿐인가? 전통과 현대가 절충된 어색한 모양새, 아니 현대화로 급격히 무너져 내리는 혼란의

풍경 말이다. 이른바 혼성(hybrid)이니 복합 문화니 하는 요즘 유행어를 여기에 대입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사북 냄새 맡기에 골몰하고 있는 동안 오치균은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간 애초 목적은 사북 화집에 실릴 작가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곳은 내가 그림 그린 바로 그 현장이어서,

또 저곳은 그림으로만 남아 있을 뿐 건물이 철거된 곳이어서.

또 사북의 역 대합실에 칠해져 있는 하늘색과 분홍색의 촌스런 페인트가 바로 사북 색깔이라면서,

그는 카메라로 또 다시 사북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북의 역사를 생생하게 밝혀주는 곳은 역시 탄광 근로자들이 살았던 집단 거주지. 1980년대까지 노동자들이 북적거렸던 집단촌이 아직도 산 중턱까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젠 사름은 빠져 나가고 주인 없는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한바탕 전투를 치러낸 뒤의 폐허처럼. 버림받은 유령의 도시처럼 변해 있다. 기관 없는 신체랄까? 참으로 기이한 풍경이다. 21세기에 내 눈앞에 닥쳐 있는 이 풍경. 나는 이내 빛 바랜 앨범 속의 사진 이미지로. 흑백 텔레비전의 영상 이미지로 빨려 들어갔다. 6.25 이후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았던 판자촌 같은. 아니면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 강점기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집단

수용소 같은 탄(炭)색 이미지…. 어디에선가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술집 작부들의 요염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들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더 지킬 것이 무엇인가?

주인은 언제 이 문을 닫았으며. 문은 언제 다시 열리는 걸까? 길거리 여기저기에는 가전 제품들이 아예 갈 곳을 잃고 나뒹굴고 있었다.
탄광 노동자들에게 꿈의 보금자리였던 사택(5층 아파트)도 아직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모두

가건물같이 지어져 있다. 슬레이트 지붕에 건물 높이가 사람 키 남짓한 곳. 골목길과 접해 있는 대문이

곧 방문인 집 구조. 근로자들의 숙소로 쓰던 작은 ‘하꼬방’ 들.

 

 

------ 사북 그림을 마치고 이제 조금 떨어져 생각하니,

사북이 미국 산타페하고 뭔가 동질감이 있는 곳이에요.

산타페에 여행 갔다가 그곳 풍경에 반해 사막 한가운데 휴양지에서 1년 동안 살았던 적 있거든요.

산타페는 옛 모습을 제대로 보존하면서 현대화시켜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죠.

세계적으로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우리나라는 옛 것을 무조건 깔아뭉개고 괴물 같은 현대 건물만 세우려 하죠.

사람들이 이렇게도 정감이 메말라 있는 걸까요?

제주도에 갔을 때도 느낀 건데,

길거리에 꼭 야자수를 심어야 해요? 다른 나라 휴양도시 같아요.

돌담이나 감귤나무로 개발해도 되잖아요?

근래에 아무 계획 없이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본래의 사북이 파괴되는 걸 보면 화가 울컥 치밀어 올라요. 여길 보세요. 그나마 살아 있는, 살아 가는 사북의 모습.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다운가요?

이 풍경마저 사라진다면 너무 아깝지 않아요?

 

 

나 역시 어느 샌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북 풍경에 편안하게 동화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사북의 촌스러움의 극치 속에서, 이 낯선 폐허의 풍경 속에서 놀랍게도 희망의 빛 자락,

아름다운 생명의 이삭들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록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선연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남루한 벽면을 내리쬐는 햇살은 탄 먼지와 대조를 이뤄 더욱 부드럽고 따스했으며, 꾸불꾸불한 기형적인 형태의 골목길 담벼락에는 이름 모를 예쁜 꽃들이 부끄러운 듯 살포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 회색 마을 사북에서 오치균이 그림으로 그려냈던 그 무엇. 그 자신이 말했던 “아, 정말 재미있는 풍경”의 실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실체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은 잃어버린 것 혹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저 먼 마음의 풍경에 대한 아련한 향수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고졸(古拙)한 것. 이른바 아르키익(archaic)한 것에 대한 고상한 취미라 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오치균의 그림이 단순히 이런 수준에

머문다면 평범한 소재주의 이상이 아닐 것이다. 변화하는 것(소재.기법)과 변화하지 않는 것(정신.영혼). 바로 이 문제를 규명하는 것이 오치균 예술의 가치. 사북 그림의 가치를 찾는 길이리라.

나의 결론은 이렇다. 오치균의 집요한 ‘사북 사랑’은 탄광촌의 잿빛 어둠의 땅에서 건강한 생명의 빛을

채집해내는 것이었다. 지식과 이성을 무장해제하고, 의식 저 밑바닥에 흐르는 동물적인 감각 혹은 근원을 충동으로 보고 느끼는 것(아름다움 혹은 진실)에 흠뻑 빠져 든 것이다. 말하자면 사상(事象)의 보편적 법칙에 따르는 로고스(logos)적 인식보다는, ‘내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대로 맡겨버리는 파토스(pathos)적 정념이 강한 태도다. 파토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즐거움(?)과 괴로움(苦)의 정서다. 특히 오치균은, 미술평론가 정영목이 지적했듯이. 원천적으로 인간의 삶의 그늘 같은 부정적인 측면에 서려 있는 기운을 끄집어낼 줄 아는 ‘심미적인 페시미스트(pessimist)’다. 그는 불안과 외로움까지도 즐긴다.

 

 

------ 여름에 사북엘 갔는데, 울창한 숲을 보는 순간 공포를 느꼈어요.

갑자기 뱀.가시.돌이 생각나는 거 있죠.

행복한 상상이 아니라 약육강식이 떠오른단 말이죠.

숲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게 되요.

나는 풍경을 보면서 나쁜 쪽으로 비약하길 좋아하나 봐요.

예를 들어 겨울눈을 보면 난 싫거든, 신경질이 난다고.

아름다운 서정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화실 올라가는 데 길이 미끄러워 힘들고,

눈 녹은 뒤의 더러운 거리도 보기 싫고.

봄의 새싹, 매화를 보면 인생을 긍정하게 되는데, 겨울은 부정적이야.

 

 

전업작가의 양지와 음지

오치균은 1991년 귀국 후 첫 개인전(금호미술관.이인화랑)에서 대박을 쳤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88서울올림픽 이후의 경기 호황을 타고 당시 화랑가는 사상 초유의 호경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치균이 귀국전에서 크게 성공한 것은 화랑 경기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작품성이 상품성을 얻기에 충분했다.

개인전을 마친 이후 나는 오치균의 작품을 한 컬렉터에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 80호, 40호 두 점 가격이 4백만 원 대였으니 젊은 작가의 작품이긴 하지만 매우 싼값이었다. 그때 나는 오치균의 화실을 찾아가 직접 골랐다. 이 작품은 뒤에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컬렉션으로 소장되었다. 오치균은 귀국 후 서울의 새로운 환경과 부딪히고 있던 시기였다. 미술기자로, 대학 후배로, 작품 판매 알선까지 맡았던 나의 작은 인정이 고마웠던지 그는 조심스럽게 답례를 한 적이 있다. 8절지 크기의 파스텔 스케치를 선물로 건네줬다. 그때 오치균은 아주 어색해 하면서 토를 달았다. “도움을 준 사람이나 진실로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싶은데, 작가가 정치나 한나고 나쁜 소문날까 두렵다”는 것. 나 역시 그림을 받는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오치균이 파스텔 그림은 흔쾌히 받았다. 이 그림은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 옆의 산과 호수를 그린 것인데, 안개 낀 듯 몽롱한 분위기를 스푸마토(sfumato) 기법의 부드러운 적자색 파스텔로 그려냈다. 두 개의 큰 산봉우리 그림자가 호수 수면에 거울에 비친 듯 또렷하게 투영되어 전체적으로 입술모양을 띠고 있다. 여성 누드의 어는 한 신체 부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에로틱한 형상이다. 이 그림은 10년 동안 우리 집 안방 침대 위에 조용히 걸려 있다.
이듬해 1992년 동숭동에 갤러리21이 개관되자, 내가 이 화랑의 개관 전시 기획을 도와준 적이 있다. 개관 그룹전에 오치균을 초대했을 때, 그는 이미 가나화랑의 전속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치균은 상업적인 성공으로 90년대를 걸어갔다.

 

 

------- 상업적인 성공?

래요. 솔직히 전시 때마다 작품이 꽤 많이 판매됐어요.

그 어려운 IMF 때도 꾸준히. 나는 지금 그림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어요.

작품이 팔리기 이전, 상업적 성공 이전에는 그 성공을 위해 달려가기도 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뛰어넘는 그림에 대한 순순한 열정도 있었죠.

힘들어도 좋은 그림이 최고의 목표였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무엇보다고 가장(家長)으로서 그림이 생계와 직접 관련되어 있어요.

화가란 것이 직업이 되면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어요.

경제적 보상 없이는 좋은 작품에 매진할 힘을 가질 수 없어요. 처절하죠.

누가 이런 말 하대요. “그래도 오치균씨는 자기 좋아하는 거 하니까 다행이라고.”

참.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아마추어는 그림 그리는 일이 즐겁겠죠.

취미로 하는 데 고통이 따르면 안 되지요. 그러나 프로가 되면 달라요.

반 고흐도 자기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해 했다잖아 요?

‘정말 좋은 그림 그릴 수 있을까?’ 이런 상황, 이거 겁나는 겁니다.

또 이런 거 있잖아요? 주위에서 “망친 그림 있으면 한 점 달라”고.

화가를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죠.

이건 텔레비전 장사하는 사람한테 고장 난 텔레비전 하나 달라고 하는 논리하고 같아요.

그림 그리는 건 1차 산업입니다.

제조업이죠.

물건이 가면 돈이 오고 그래야 재투자, 재생산할 수 있습니다.

난 스포츠카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게 내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만, 그걸 타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단 말이죠. 그래야 내 인생이 즐겁단 말이에요.

아침에 일어나 화실로 가서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그림 그리다 퇴근해 집에 와요.

난 일년 365일 이런 생활의 연속인데, 그런 단조로움의 고통이 가장 참기 힘든 화가 생활의 일부죠.

불 끄고 집에 갈 때 컴컴한 화실이 무서워 도망치듯 뛰어 나올 때도있어요.

나한테는 화실이 ‘1인 직장’이죠. 난 일요일은 화실 가는 게 싫어요! 나도 휴일엔 쉬고 싶고,

취미 생할도 하고 싶단 말이죠.

화가들도 그림 이외의 인생을 즐길 권리가 있어요.

예술가도 똑 같은 사람 아니겠어요?

 

 

전 업(全業)화가. 화가면 화가지 ‘전업’화가는 또 뭔가? 말인즉, 완전히 그림 그리는 일만을 직업으로 삼는 화가란 뜻이겠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다른 직업(특히 교수)을 겸업하는 화가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작가 스스로 전업을 선택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직업(교수)을 겸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전업을 하는 대다수다. 반대로 잘 나가는 작가는 교수를 겸업한다. 적어도 교수 직함을 가지면 경제적.사회적 안정은 물론이고 작가적 평가에서도 이득을 본다. 여기에 자신 있게 이의를 제기할 작가가 있다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 90년대 화단에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H화백도 40대에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면서 자랑스럽게 전업화가를 선언했지만, 그는 줄곧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리워했고, 실제로 말년에 대학 강의를 겸하며 살다 갔다.

이미 20년 전에 한국 미술의 중요 쟁점을 지적할 때, ‘교수와 화가의 분리’문제가 단골 메뉴로 등장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진정 달라진 게 뭐가 있는가? (교수와 화가의 분리는 일반 교육뿐 아니라 미술문화의 제반 환경 등 여러 사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작가 의식 따위로 간단히 해결될 가벼운 문제는 결코 아니다. 나 역시 이 문제에 분명한 대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세계적인 교육열에 불타 있는 우리 사회에서 오히려 작가들의 교수 선호도는 더욱 심화되고 확대되지 않았는가? 오죽하면 최근 한 미술평론가가 ‘공예 비엔날레는 교수 비엔날레’라고 직격탄을 날렸겠는가?

 

 

------- 1차 산업은 제품을 제조하지 않으면 공장이 멈춥니다.

누가 나한테 그래요. “당신은 시간도 많은데, 걱정 없이 어디 여행이나 다녀오지.”

참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죠.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제품 생산에 씨름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공장이 멈추니까요.

난 항상 불안하고 처절해요. 외부 사람하고 전화도 안하고 산답니다.

어쩌다 한 사람 만나면 이틀 동안 귀가 윙윙거려요.

내 단점이라면 모든 걸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인데,

생활비가 조금 없으면 바로 굶어 죽는 걸 상상하고,

그림이 잘 안 되면 영원히 그림을 못 그릴 것 겉은 생각에 사로잡혀요.

그러다 보니 사회적으로 부딪히게 되고 점점 외부 활동이 줄어들고…,

이런 게 거꾸로 그림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정말 내가 결벽증인지 모범생인지 자폐증인지 도무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요즘은 내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겉모습보다 내속으로 파고드는 삶, 수도하는 것도 이런 게 아닌가 해요.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화가 오치균의 그림은 쉽게 말하면 구상이다. 자연의 구체적 대상을 그림의 소재로 삼는다. 1985년 첫

개인전 때는 돌고래, 코끼리를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 터치의 표현적 수법으로 그려냈다. 그 후 유학 시절에는 뉴욕 슬럼가의 홈리스, 뒤틀린 형상의 벌거벗은 남성 누드, 어두운 지하철, 실내의 소파를 그려냈다. 또 서울로 돌아와서는 거리의 자동차, 북한산에서 내려다본 평창동, 현저동 재개발 지역, 한강다리.

남대문.절두산 성지.세검정.이충무공 동상 같은 역사적인 기념물 등이 작품의 소재로 등장한다. 눈을

뜨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들이다. 그럼에도 오치균의 그림을 진부한 구상으로만 평가하지 않는 이유, 여기에다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거기에는 소재를 뛰어넘는 작품의 조형적 장치가 담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치균은 눈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외치듯이 그 어떤 소재든 그릴 수 잇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잇다. 더구나 평범한 소재를 비범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빼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풍경화의 고정 관념이 얼마나 ‘그림 같은(picturesque)’것에만 쏠려 있는가를 상기하자.) 말하자면 사북 풍경을 비롯한 오치균의 풍경화는 ‘그림 같지 않은’소재와 구성이 더 많다. 이것이야말로 오치균 그림의 독자성이자 매력이다.

나는 오치균의 그림에 ‘종합’보다는 ‘단편’. ‘조화’보다는 ‘부조화’. ‘휴일’보다는 ‘전쟁’이라는 단어를 적용하고 싶다. 좀더 전문적인 이야기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이 미술작품의 양식 분석 방법으로 제시한 ‘고전’과 ‘바로크’를 현대적으로 동원한다며, 오치균의 작품은 바로크 양식에 더

가깝다. 뵐플린이 내놓은 고전과 바로크의 중요 원리, 말하자면 선적인 것(linear)/회화적인 것(painterly), 닫힌 형식/열린 형식이라는 개념의 쌍 중에서 후자와 친연성이 있다. 여기서 오치균 그림의 조형적 특징을 언급해 두자.

첫 째,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지두화(指頭畵)’를 그린다. 손가락으로, 손바닥으로 물감을 크림과 같이 두텁게 층을 지어 발라 올리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구사한다. 구축적인 강력한 화면의 질감이 특징이다. 두툼하게 쌓아 올린 화면의 질감은 평면 회화이면서도 촉각적이자 거의 조각적이다. 선으로 ‘그린다’는 개념보다는 ‘칠한다’거나 ‘바른다’는 개념에 더 가깝다. 미장이나 도공의 재빠른 손짓을 생각해 보라. 화가의 느낌과 감각이 다른 물리적 도구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손과 질료가 부닥치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풍경의 형상 하나하나는 무수한 물감 덩어리의 반복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의식적인 집중력이 요구되는 이 반복 행위를 통해 오치균은 풍경에 자신의 마음(심리)를 차곡차곡 싣는다.

둘째, 일반적인 상식을 여지없이 깨는 파격의 구도 설정이 많다. 대상을 정물화처럼 클로즈업시킨다든지, 그리하여 근경이 화면에서 제멋대로 잘리는 ‘불편한’그림이 많다. 하늘이 지나치게 넓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좁은 그림도 있다. 풍경들이 그림 틀 안네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가장자리와 바깥 너머의 공간으로 무한히 열려 있다. 수평 수직의 정적인 구도보다는 대각의 역동적인 구도가 많다.

셋 째, 그림이 어둡고 칙칙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밝고 어두움이란 얼마나 상대적인가? 어둠의 기준은 무엇이고, 밟음의 기준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표리 관계에 있다. 분명한 것은 오치균이 수업시절부터 끊임없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내는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실내에 비쳐 들어오는 자연의 빛이건, 캄캄한 땅 속의 지하철 불빛이나 어두운 방의 텔레비전 주사선의 불빛 등 인공의 빛이건, 그는 그림에서 빛의 극적인 효과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사북에서는 새카만 죽음의 풍경 속에서 생명,혹은 희망히라는 정신의 빛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짙은 어둠일수록 그 속의 빛은 더욱 찬란하다.

여 기서 하나의 숙제가 남는다. 오치균의 그림 주제는 무엇인가? 그가 그림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주제가 있긴 한가?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그리하여 복잡한 문맥(context)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 작품을 염두에 두고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다시 사북에 쏠려 있다. 오치균은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서울의 달동네 풍경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면에 주목했고, 당시 평단에서는 이러한 작품의 성격을 민중미술류의 사회적 발언으로 높이(?) 평가하려는 작업이 있었다. 당시 오치균은 이러한 평가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는데, 거기엔 어떤 부담과 갈등이 잠복되어 있었다. 문제는 지금, 바로 이 사북 그림에서 오치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 난 그림에 특별한 생각을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림이란게 역사나 사회를 변화 변혁시키는 거창한 생각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요.

색깔, 구도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솔직히 표현할 뿐이죠. 거기에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풍경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내 인생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고 믿고 있어요.

나의 총체적 표현이랄까?

태생적인 나, 사회와 부딪치는 나,

그런 것들이 비빔밥이 되어 내가 장미가 되고, 내가 사북이 되고… 아주 소박해요.

야, 여기 참 골 때리네? 이 곳 풍경은 왜 이렇게 모두 새카맣지? 여기 되게 웃긴다….

그런데, 사북이 탄 가루 때문에 새카맣다는 걸 몰랐지 뭡니까?

사북을 그리고 사북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러나 난 사북에서 살지는 못할 것 같아요. 우선 불편한 화장실부터 떠오르니 내가 이미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나 봐요. 이런 모순을 누군가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오치균씨 저변에 가난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고,

단지 그것에 대한 거부 반응일 뿐이라고….

 

40대의 삶, 40대의 예술

오치균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시간, 그는 자신의 그림 이야기에서 벗어나 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창작 환경에 관한 내용으로 쏠리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자신이 처한 전업작가의 위치, 거기에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는 교수 문제가 나오면 그는 마구 열을 냈다. 그것은 막연한 편견과 냉소라기보다는 오로지 작품으로 승부해야 하는 생존의 몸부림,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 자신의 굳건한 마음 다짐이

우회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믿고 싶었다. 오치균이 화랑의 후진적인 경영방식과 낮은 문화 마인드, 예술 활동에 임하는 작가들의 아마추어적 태도와 의식, 비평과 저널리즘의 폐해, 컬렉터들의 몰상식함 등등을 조목조목 거론한 것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그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이긴 했지만, 분명 우리 미술계가 극복하고 개선해야 할 문제점들이었다.

 

 

------ 주위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직업란에 ‘화가’라고 쓰지 않고 ‘교수’라고 적는 걸 봤어요.

타이틀은 교수, 또 한편으로는 예술가로 내세우고 있죠.

나는 예술가적 삶과 교육자로서의 삶은 다르다고,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유로움이 작가에겐 생명인데, 교수는 여러 환경의 제약이 따르니 그럴 수 없잖아요?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너무 약하다는 겁니다.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들이 ‘서울대’라는 사실은 목소리 높여 자랑스럽게 내세우면서

전공은 슬그머니 감추더라고.

요즘도 난 일정한 수입이 없어서 비자도 잘 안 나온다고요.

교수, 난 애초부터 포기했죠. 교수되려면 학교 때부터 선생님들한테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난 모든 게 등외였어요. 그림에선 상당히 모범생이라 생각했는데, 외모가 어필하지 않았던지….

뭔가 불량기가 있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미국 유학 갈 때 학교 교수가 추천서를 안 써 주더라고.

근데 미국에서는 촉망 받는 작가로 장학금을 받았다고요.

대학원 전체에서 1등 했거든요.

화가에겐 그림만이 평가 기준이라는 것.

적어도 외모나 태도 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정말 미국은 달랐어요.

미국에서 돌아와 교수 채용 응모에 원서를 낸 적이 있긴 해요.

딱 한번,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저는 또 그냥 되는 줄 알고 원서를 냈는데 떨어졌어요.

왜? 대들었다고.

글쎄, 면접 때 내 그림이 너무 어둡다는 거야.

그러면 그때 “예 그렇습니다. 앞으로 밝게 그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하고 고분고분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어요. 그림이 어두운 거 하고 교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런 식의 문제제기를 정면에서

해대니 당연이 떨어지죠.

날 아끼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해요.

“오치균 씨가 교수 한번 되는 거 봤음 좋겠다. 생활이 바뀌면 그림도 바뀌지 않겠느냐?”뭐 이런 논리죠. 나도 하고 싶긴 해요.

교수란 직함이 참 멋있잖아요?

 

 

이번에 오치균을 만나보니 첫 인상부터 이전과 사람이 좀 바뀐 느낌이 들었다. 우선 빼빼 하고 약간 병기가 있어 보이던 몸이 마치 운동선수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한 가닥 하는 건달 깡패 같은 자태가 우러나왔다. 누군가 시비라도 걸면, 그렇잖아도 몸이 근질근질한데 너 잘 만났다며

금세 육탄전을 벌일 태세였다. 그는 자신의 역삼각형 상체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신체 변화는 정신적인 변화, 예술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리라.

 

 

-------- 40대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들더라고. 인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죠.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지만, 올바른 길이 뭔가? 전시를 한다, 그림을 그린다. 난 과연 떳떳했나?

결론은 올바르게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건강 문제도 신경을 쓰게 됐죠. 40대부터 건강이 급격히 기울어 가는 것 같아요.

몸을 바꾸었어요. 체중이 54kg에서 73kg으로 늘어났어요.

담배도 끊고 운동하면서 줄창 먹어대니까 내 몸이 이렇게 변했어요.

건강 보다는 빼빼 마른 몸에 대한 콤플렉스 극복의 의미가 더 크죠. 이젠 몸매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콤플렉스 극복은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요.

 

 

http://blog.daum.net/m-deresa/12386128

 

 

 

Who Are We / James Last and His Orch

 

1929년 4월 27일 독일 브레멘이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제임스 라스트는 브레멘 음악학교에 입학, 더블 베이스를 전공하였고,

라디오 브레멘 댄스 오케스트라 에 가입하는 등 자신의 음악에 대한 끝없는 의지를 불태워갔다.

마침내 1948년 제임스 라스트는 그의 형 들과 함께 '라스트 베거 앙상블'을 조직하여,

그는 독일 재즈 베이스 계의 제1인자로 칭호를 받으며 그의 성공을 예감하였다.

 


1955년 함부르크로 가서 북독일 라디오 댄스 오케스트라에 가입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편곡과 작곡실력 에 음악을 사랑하는 대중들의 사로잡았고,

그의 끊임없는 열정에 1964년 폴리돌과 전속계약을 맺으며 팝뮤직역사에 가장 성공적인

아티스트로 우리들의 기억속에 머리속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만큼이나 수상경력도 화려했다.

독일 레코드 파냄협회에 주관하는 "레코드아티스트"로써 MIDEN 트로피를 수여받았으며,

"Goldenen Europa", "GoldenenKamera", "Echo Life Award 1994" 등의 수상 경력 과

17장의 플래티넘, 206장의 골드 디스크를 기록했으며,

캐나다에서 열린 엑스포69에서 무려 9개에 달하는 골든 디스크와

폴리톤 최고의 상인 골든 그라모폰을 수여받음으로써

그의 명성은 최고의 절정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