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통일신라 923년, 비석높이 273.0cm.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가 2009년, 보물 제138호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었다. 지증대사(824~882)의 일대기를 담은 이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이 짓고, 분황사의 83세 노스님 혜강이 쓰고 새겼다.
최상의 비석돌인 보령 오석(烏石)에 새긴 것이어서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윤기 나는 까만 돌 속에 글씨가 하얗게 드러난다. 여초 김응현은 남한에 있는 금석문 중 으뜸이라고 했다.
지증의 본명은 도헌(道憲)이다. 불과 아홉 살 때 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부석사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고행에 나섰다. 그런 중 숲길을 지나는데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친 사람이 그 깨달은 바를 나중 사람에게 나눠줌이 인색해서는 안 된다"며 사라졌다.
스님이 그뜻을 받아 계람산 수석사에서 법회를 여니 대중이 대밭처럼 빽빽이 들어찼다고 한다. 스님의 명성이 높아지자 경문왕이 "새가 자유로이 나무를 고르듯이" 찾아와 달라고 초대했지만
"진흙 속에 편히 있는 나를 화려한 강물에 띄우지 마십시오" 라며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날 문경에 사는 심충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희양산 봉암(鳳巖)계곡의 자기 땅에 절을 지어 달라고 하자 가서 보고는 "여기에 스님이 살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되리라" 라며 절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암사다.
헌강왕이 등극하면서 "좋은 인연은 같이 기뻐하고 먼지구덩이는 온 나라가 같이 걱정해야 한다" 며 스님의 가르침을 구하자 서라벌 월지궁(月池宮 안압지)으로 가서 한차례 설법을 베풀었다.
다시 봉암사로 돌아가고자 하니 왕은 눈길이 미끄럽다며 한사코 붙잡다가 결국 가마 한 틀을 내주었다. 그러자 스님은 지팡이를 짚고 가며 병자가 생기거든 태우라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자신이 병에 걸려 그 가마에 실려 절집으로 돌아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을 최치원은 이렇게 적었다.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빠졌도다" (星回上天 月落大海)
나라에서는 "지증"이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사리탑에는 "적조"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래서 이 비의 이름이 "지증대사적조탑비"가 된 것이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에서..) |
'미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라벨//세헤라자드 1. '아시아' (Asie) - 제니퍼 라모어 (0) | 2012.01.27 |
|---|---|
| James Casebere - 공간 : 빛과 그림자 (0) | 2012.01.26 |
| 아름다운 여인 / 헤르만 헤세 (0) | 2012.01.25 |
|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푸쉬킨 (0) | 2012.01.24 |
|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 우창헌展 (0) | 2012.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