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치는 밤에 누가 돌아오나 보다/ 유장경

창포49 2020. 1. 30. 16:22


 

              


 

눈보라 치는 밤에 누가 돌아오나 보다/ 유장경

 

날 저물자 푸른 산 멀어져가고             日暮蒼山遠(일모창산원)

찬 하늘, 가난한 하얀 초가집               天寒白屋貧(천한백일빈)

사립문 멍멍이가 멍멍 짖으니              柴門聞犬吠(시문문견폐)

눈보라 치는 밤에 누가 돌아오나 보지   風雪夜歸人(풍설야귀인)

* 원제: 逢雪宿芙蓉山(봉설숙부용산: 눈을 만나 부용산에서 자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는 노벨문학상을 타야 마땅한데 상복이 없어서 못 탄 사람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명구가 포함된 저 유명한 ‘해변의 묘지’의 작자이고,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좌우명을 내게 준 분이기도 하다.


“내 시는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부여하는 의미를 지닌다.” 역시 그 상복 없는 시인이 남긴 명언이다. 그러니까 시의 의미는 처음부터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 의하여 부여되는 것이라는 뜻이 되겠다. 발레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는 일단 발표되고 나면, 그 때부터는 독자들의 시다. 그 시를 읽는 독자들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읽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사 시인의 의도와 다르게 읽혔다고 하더라도 그게 큰 문제가 될 일도 없다. 오히려 다양하게 읽힐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야말로 걸출한 작품일 가능성이 높고, 세계의 명작들도 대부분 그런 작품이다.

 

당나라의 시인 유장경(劉長卿)이 지은 위의 시도 이해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을 수 있는 작품이다. 대번에 그림이 떠오르지만, 독자마다 그 그림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물론 상상하기 나름이다. 실제로 이 시를 소재로 한 그림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가 꽤 많이 남아 있는데, 그들은 모두 천차만별의 다양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마당개가 짖고 있는 초가집으로 누군가가 돌아오고 있는 것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나, 그 초가집 앞으로 나그네가 그냥 지나가고 있는 그림도 있다. 그렇게 되면 돌아오고 있는 그림이 아니라 돌아가고 있는 그림이 되는데, 조선후기의 화가 최북(崔北)의 ‘풍설야귀도’가 그런 경우다.

 

최북의 그림 속에는 개가 대문 밖까지 쫓아 나와 맹렬하게 짖어대고 있는데, 나무가 온통 휘어질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노인과 아이가 짖고 있는 개 앞을 지나가고 있다. 한밤중 혹독한 추위 속에서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갈까? 이 첩첩산중에 어디 갈 데가 있기는 할까? 저러다가 혹시 얼어 죽지는 않을는지, 겁이 덜컥 나는 상황이다. 최북은 왜 돌아오고 있는 그림 대신에 돌아가고 있는 그림을 그렸을까? 아직도 혹독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자신의 참으로 가혹한 생애가 이 시의 이해에 은연중에 반영된 결과일 게다. 그러고 보면 최북의 그림은 유장경의 시를 그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그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실제로 오랜 굶주림 끝에, 그림 한 장 팔아서 술을 퍼마시고 돌아가다가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어버렸다. 새해 벽두부터 날씨가 찬데, 돌아갈 데도 없으면서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연유다. (글: 이종문-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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