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연꽃처럼 시들어 가네/ 원나라의 어느 여인

창포49 2019. 11. 1. 13:23

      


나도 연꽃처럼 시들어 가네/    원나라의 어느 여인

  

내게 보내주신 한 송이 연꽃 贈送蓮花片(증송연화편)

처음엔 환하게 곱고 붉더니 初來的的紅(초래적적홍)

꺾인 지가 지금 며칠이런가 辭枝今幾日(사지금기일)

나처럼 초췌하게 시들어가네 憔悴與人同(초췌여인동)

    

 

고려 충선왕(忠宣王:1275-1325)이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뜨겁게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도 물론 왕을 뜨겁게 사랑했다. 그러므로 왕이 귀국하게 되자, 당연히 따라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함께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별의 정표로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돌아섰지만, 그 여인이 그리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은 동행하고 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에게 다시 돌아가서 여인의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돌아가 보니 여인은 다락 속에 앉아 있었는데,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여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위의 작품이다.


분석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가슴에 다가오는 시다. 왕으로부터 이별의 선물로 받았던 연꽃이 며칠 만에 폭삭 시들어버렸듯이, 사랑을 잃은 자기 자신도 그 연꽃처럼 수척하고 초췌하게 시들어가고 있다는 거다. 아주 단순한 작품이지만, 상황을 생각하고 음미해보면 심금을 울리는 찡한 시다. 그들의 사랑을 지켜봤던 익재도 물론 가슴이 아팠을 터다. 그러나 익제는 돌아와서 아주 엉뚱한 보고를 했다. “그 여인은 술집으로 들어가서 젊은 남자들과 술을 퍼마시면서 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는데, 찾아봐도 어디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익재의 보고를 받은 왕이 ‘더러운 년’이라며 땅에다 침을 ‘퇴’ 뱉었다.

 

   다음 해 왕의 생일날이었다. 익재는 왕에게 술잔을 올린 뒤에 뜰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려서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사오니, 어서 저를 죽여주십시오.” 왕이 그 연유를 묻자, 익재가 그제서야 그 여인이 지은 시를 바치고 그때 상황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사연을 알게 된 왕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그 때 이 시를 보았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여인에게 유턴했을 게다. 경(卿)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거짓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조선전기의 문인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수록된 이야기다. 그 여인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면, 익재의 새빨간 거짓말이 꼭 옳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익재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건 것만은 분명하다. 이 시대의 높은 사람들이여. 가슴에다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그대들은 혹시 그대들의 목숨 하나를 위해 나라를 다 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글: 이종문(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매일신문 - '이종문의 한시 산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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