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대인(待人)] 최사립

창포49 2019. 5. 22. 18:52

기다리는 마음[대인(待人)] 최사립

천수사 절문 앞에 버들 솜이 날리는 봄

天壽門前柳絮飛(천수문전유서비)


술 한 병 들고 왔네, 벗이 오면 마시려고

一壺來待故人歸(일호래대고인귀)


눈 빠지게 보는 사이 날도 이미 저무는데

眼穿落日長程晩(안천낙일장정만)


가까이 와서 보면 다 내 벗이 아니구려

多少行人近却非(다소행인근각비)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落水) 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앞의 것은 육당 최남선의 시조 [혼자 앉아서]의 전문이고, 뒤의 것은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일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참으로 절묘하게 묘파(描破)한, 기다림 시의 절창들이다. 하지만 앞의 경우는 일방적인 기다림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그만둘 수도 있다. 뒤의 경우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지나가면 그냥 돌아가도 무방하다. 그런데 약속은 분명히 했지만 약속 시간이 확실하지 않은, 정말 막연하고 하염없는 기다림도 있다. 고려의 시인 최사립(崔斯立:?-?)이 지은 위의 시가 바로 그런 경우다.

버들 솜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봄날, 화자는 개성 사람들의 이별과 만남의 현장이었던 천수사 문 앞에서 돌아오는 벗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 오기로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몇 시에 도착할지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약속 시간이 하루 종일이기 때문에, 화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지 않는 벗을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다. 벗과 함께 마실 맛좋은 술 한 병을 손에 들고서.

이제 땅거미가 짙어온다.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죄다 내 벗으로 보이기 시작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와서 보면 내가 기다리는 그 벗이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꽝’하고 닫히는 순간이다. 그래, 그 마음 나도 알 것 같다. 이등병 시절 전방에서 보초를 서다가 보면, 저 멀리 면회 오는 아가씨들은 말할 것도 없고, 면회를 오시는 할머니까지도 내 사랑 ‘그녀’로 보이지 않았던가.


                                            글: 이종문(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