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 술에 흠뻑 취해[취후(醉後)]/ 정지상

창포49 2019. 5. 12. 08:19

              


술에 흠뻑 취해[취후(醉後)] 정지상


붉은 복사꽃은 지고 새는 뭐라 재잘대고
桃花紅雨鳥喃喃(도화홍우조남남)

집 두른 푸른 산엔 간간이 푸른 이내
繞屋靑山間翠嵐(요옥청산간취람)

비뚤어진 오사모를 비뚠 대로 그냥 두고
一頂烏紗慵不整(일정오사용부정)

꽃 언덕에 취해 자며 저 강남을 꿈꾼다오
醉眠花塢夢江南(취면화오몽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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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다시피 정지상(鄭知常:?-1135)은 묘청과 함께 서경천도 운동을 주도하다가, 김부식에 의해 처형을 당했던 시인이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정지상의 시들은 피비린내 나는 그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작품 속에 설정된 공간부터가 세속 현실과는 멀리 떨어진 탈속적 공간인 경우가 많다. 홍진세계와는 전혀 다른 순수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순간 그림이 펼쳐지기 일쑤인데, 이 작품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환한 봄날, 푸른 산 한 가운데 조그만 초가집이 한 채 서 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산에서는 간간이 푸른 이내가 일어나고 있다. 바로 그 푸른색을 배경으로 하여 붉은 복사꽃이 꽃비가 되어 펄펄 떨어진다. 신바람이 난 새떼들도 무어라, 무어라고 지저귀고 있다. 시선을 좀 더 가까이로 돌리면, 떨어지는 복사꽃 아래 지금 한 사내가 낮술에 벌겋게 취한 채로 누워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곤다. 비뚤어진 오사모(烏紗帽)를 비뚠 대로 그냥 내버려 둔 채.

오사모는 조정에 출근할 때 쓰는 모자다. 조정에 있을 때라면 근엄한 법도와 삼엄한 규범을 따라야 할 터. 오사모가 비뚤어져 있다면 그 것 자체가 바로 불경(不敬)에 해당된다. 하지만 여기는 조정이 아니라 꽃 지고 새우는 자연이므로, 화자는 비뚤어진 오사모를 비뚠 대로 그냥 내버려 둔다. 지금은 법도와 규범의 뻣뻣한 구속에서 완전 해방된 상태이니까. 아마도 조정에서 퇴근을 하다가 아름다운 봄날의 정경에 취해 거나하게 한잔 들이켰나 보다. 벌렁 드러누워 강남땅을 꿈꾸고 있는 그의 얼굴 위에 복사꽃이 막무가내로 떨어지고, 떨어지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 당나라의 시인이자 남종(南宗) 산수화(山水畵)의 창시자이기도 한 왕유(王維)의 시와 그의 그림에 대한 송(宋)나라 시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평(評)이다. 하지만 어찌 왕유의 시에만 그림이 있으랴. 이 작품도 역시 이왕이면 수채화로 곱게 그려서, 호연정(浩然亭 ) 대청마루에다 걸어두고 싶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화자 대신에 독자를 그려주면 더욱더 좋고.

                                                        글: 이종문(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산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