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 눈보라 속 꽃망울을 터뜨렸더냐? 왕유(王維)

창포49 2019. 2. 14. 08:50

 

                                                                                            홍매 - 차규선 화백 작





눈보라 속 꽃망울을 터뜨렸더냐?      왕유(王維)


 

그대

고향에서

여길 왔으니

응당

고향 소식

알고 있겠군

 

오던 날

비단창 앞

매화 한 그루

눈보라 속

꽃망울을

터뜨렸더냐?

 

 

君自故鄕來(군자고향래) 應知故鄕事(응지고향사)

來日綺窓前(래일기창전) 寒梅着花未(한매착화미)

*원제: [雜詩(잡시)]



소한은 이미 지났지만, 대한이 아직 딱, 버티고 있다. 참 춥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남쪽나라에서는 매화가 벌써 꽃망울을 펑펑 터뜨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작년 겨울 차규선 화백이 손수 그려서 내 서재에다 걸어놓고 간 통도사의 홍매화를 바라보는데,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699?-759)가 지은 이 귀여운 한시가 불쑥 떠오른다.


고향을 떠난 지 제법 오래된 작중 화자가 이제 막 고향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 반갑고 나니, 고향 소식이 울컥, 궁금하다. 궁금한 것이 물론 한둘이 아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족들 소식이 제일 궁금할 게다. 그런데 화자는 정말 엉뚱하게도 비단창 앞에 있는 매화 소식 하나만을 달랑 묻는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매화가 펑펑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더냐고? 화자가 매화를 아주 각별하게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눈보라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매화를, 그것이 향긴 줄도 모르는 채로 향기를 내뿜고 있는 매화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는 데서 작중 화자의 고매한 품격과 드높은 절조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그렇지는 않다는 견해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 매화가 위치한 곳이 비단창 앞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아내가 거처하는 방에는 창호지 대신에 비단으로 창을 발랐기 때문이다. 화자는 매화 소식 하나만을 달랑 물었지만, 실상 매화 소식 속에 아내 소식이 은밀하게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안부가 아무리 궁금해도 만약 이 대목에서 ‘우리 마누라는 잘 있더냐?’라고 물었다면, 얼마나 싱겁고 멋대가리 없을까. 그렇게 물었다면 이 시는 산통이 와장창 깨졌을 게다. 요컨대 고향 소식을 물으면서 엉뚱하게도 매화 소식을 묻고, 매화 소식 속에 은근하게 아내의 안부를 묻는, 이 낯설고도 오묘한 수법이 이 작품을 그윽하고도 깜찍한 시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김용택 시인의 ‘봄날’이다. 나 찾다가 대청마루에 먹물이 덜 마른 몽당붓만 있거든, 난데없이 어느 화가를 따라 통도사 홍매 보러 간줄 알그라. 선암사 청매 보러 간 줄 알그라.

             (글: 이종문-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산책'에서



 

   



 

Andante - 김일수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