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난계(寒暖計)/윤동주

창포49 2018. 10. 16. 22:23






  

  





                        한난계(寒暖計)/윤동주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맨 한난계,

                     문득 들여다볼 수 있는 운명한 오 척 육 촌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輿論動物),

                     가끔 분수 같은 냉(冷)침을 억지로 삼키기에,

                     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로 손가락질할 수돌네 방처럼 추운 겨울보다

                    해바라기가 만발할 팔월 교정이 이상(理想)곺소이다.

                    피 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

                    이렇게 가만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감상과 생각]


              ** 한난계(寒暖計) - '온도계'를 일컫는 북한지방의 말입니다.

              윤동주님이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한난계(寒暖計)'라는 말을 쓴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온도계'라는 말보다

              이 '한난계(寒暖計)'라는 말이 더 정스럽습니다. 두 단어 모두 온도를

              나타내는 말이기는 하지만, '한난계(寒暖計)'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차고 따뜻하고를 말해주는' 정감이 담긴 듯하여서입니다.


              이 詩를 읽으면서, 윤동주님의 슬픔이 오롯이, 절절히 전해집니다.

              첫 소절이,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맨 한난계(寒暖計)'라서,

              흠칫 놀랐습니다. '불운한 일제 강점기의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자유로운 주장이나 자유로운 의지, 주권主權)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비틀어매어진 한난계(寒暖計) 같은, 국가와 자신의 운명에 대한

              비탄(悲歎)이 애틋하고 아프게 읽힙니다.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은데.....


              싸늘한 대리석에 묶인 듯한 처지에서, 영하로 손가락질할 수돌네 방처럼

              추운 겨울 속에서, 詩人은 '해바라기가 만발할 팔월 교정을 꿈꿉니다....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씨인 것처럼, 이 비탄(悲歎)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좋은 날씨'가 오리라고 혼자서 가만가만,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귓속 이야기를 합니다.


               마지막 연에서의 조용한 듯한 외침과 바램은, 슬프고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이라는 말이, 숨막히는 압박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 울타리 속에 갇혀서 자유를 잃은 처지이지만,

               그 '갇힘' 속에서 오로지 보이는 것은 '하늘'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하늘'은 이 답답한 '갇힘'에서의 유일한 희망이고,

               '뛰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며, '역사 같은 포지션position을 인식하며

               간절히 울타리 안을 뛰쳐나가고 싶은, 또는, 울타리 안을 뛰쳐 나가고 싶게

               종용(慫慂)하는, 하늘의 배려입니다. 마음이 찡해져 옵니다.....

               그런 의미의 맥락으로, '역사 같은 포지션position'에서 '포지션position'이라는

               詩語는 탁월한 단어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동주님이 닛쿄 대학에 입학해서, 나중에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던

               기록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연에 쓴 '역사 같은 포지션' 대신

               다른 말을 쓰려 했다면,  '역사 같은 위치', 혹은 '역사 같은 시점' , '역사적인

               상태', '이러한 역사 속에서의 나의 입장', '역사에 대한 나의 의무' 등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포지션position'을 씀으로써 '위치', '시점', '상태', '입장', '의무'의

               모든 의미를 다 아우르고 있습니다.


               가을 오후에, 윤동주님의 귀한 詩를 마음에 담아 간직합니다.


                                                         - 2018년 10월 15일, Morningdew 모닝듀 -




                                      

                                  - 나르샤 한성(漢城), Morningdew 모닝듀 -




 

Pietro Mascagni - Cavalleria Rusticana / Intermezzo(간주곡) 햇빛 쏟아지던 날


** 귀한 음악을 선곡해 주신 고운매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모닝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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