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세편의 후기 소나타중 마지막 32번입니다. "사파와 열반"의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는 곡입니다. 베토벤은 애당초 이 소나타를 3악장으로 할 예정이었습니다. 신트라가 던진 " 왜 3악장은 쓰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베토벤은 답변하기 난처했던지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라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면서, "만약 3악장을 썻다면 변주곡은 부분적으로 다른 구성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사실 베토벤은 처음 착상에서는 제3악장에 빠른 알레그로 악장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주제로는 제1악장에 나타나는 동기를 예정하고 있엇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이 언제 구체적으로 2악장 형식의 소나타로 처음의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은 그 주제 동기 자체에 담겨 있으며, 이는 곧 주제속에 내장된 기본선을 베토벤이 파악한 순간이었음이 틀림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엘리 네이 Elly Ney (1882~1968)
엘리 네이는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중에 한 명이다. 그녀는 독일 뒤셀도르프(Dusseldorf)에서 1882년 9월 27일 음악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Bonn)에서 성장한다. 1892년부터 19세기 낭만주의 전통을 잘 이어받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는데, 쾰른에서 Franz Wullner와 Isidor Seiss, 그리고 비엔나에서 테오도르 레치티키(Theodor Leschitizky)와 에일 폰 자우어(Emil von Sauer)에게 사사하였다. 자우어는 일찍이 리스트의 제자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1904년 그녀는 유럽 여러 곳을 순회하며 성공적인 연주회를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바로 네이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녀의 초기 순회공연은 솔리스트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독일 바이올리스트 윌리엄 반 후그스트라텐(Willem van Hoogstraten)과 첼리스트 프리츠 레이츠(Fritz Reitz)와 함께 트리오로 공연하게 된다. 윌리엄 반 후그스트라텐이 쾰른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1907년 그녀는 그를 만나게 되고, 1911년 네이는 그와 결혼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지휘자로 데뷔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21년 그들은 미국을 방문하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기념 음악회를 갖는다. 반 후그스트라텐은 여름 시즌들 동안 뉴욕 필하모닉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하게 되었고, 겨울 시즌 동안은 정규적으로 미국 오레곤 포트란드 심포니 오케스트라(Symphony Orchestra at Portland)를 지휘하게 된다. 엘리 네이와 윌리엄 반 후그스트레텐은 지속적인 활동하게 되고, 특히 독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들은 Starnberger See의 Tutzing에 정착하여 네이는 세계순회 리사이틀 하게 될 준비를 한다.
1931년 엘리 네이는 젊은 첼리스트 루드위그 홀레쳐(Ludwig Hoelscher)를 만나게 되고, 바이올리스트 빌헬름 스트로스(Wilhelm Stross)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하게 된다. 몇 년후에는 바이올리스트 막스 스트러브(Max Strub)로 교체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그녀는 잘츠브루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기질적인 정열과 직관적인 감정의 조화를 이룬 엘리 네이의 연주 스타일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 피아니스트 테레사 카레노(Teresa Careno)는 그녀 앞에서 "네이는 본질적으로 강인한 타건으로 피아노가 노래하는 것처럼 연주한다. 그녀의 뛰어난 테크닉은 음악을 아주 잘 들리게 해준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그녀의 연주 기법에 있어서 최약음 8도 음정의 레가토 연주는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죽음 앞에서 반평생을 보낸 네이는 자신을 피아노 "Grand Old Lady"로 말하곤 했었다. 그녀는 점점 통찰력 있는 연주들로 청중들을 황홀하게 하였다. 청중들은 윈켈만(Winckelmann)의 "고귀한 소박함과 조용한 장대함" 명언을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의미는 녹슬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그녀의 기술적인 기교와 연주에 대한 충실도를 말하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 젊은 시절 네이의 레파토리는 Moscheles, Paderewski, Ernst Toch등과 같은 작곡자들의 현대음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나이 들면서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베토벤, 멘델스죤, 브람스의 작품들에 집착하게 된다.
남은 여생 동안 네이는 브람스와 베토벤 연주의 대가로 평가받게 된다. 엘리 네이는 음악의 윤리적인 힘을 믿었고 그녀가 죽기 2주전까지 집에서 혹은 여러 곳에서 이런 그녀의 믿음을 전하고자 노력했었다.
1968년 3월 8일 다름슈타드(Darmstadt)에서 네이의 리사이틀 있었다. 85세인 네이는 그 날 저녁부터 몸이 편치 않아 보였고 오후에 그녀는 주치의로부터 이 날 리사이틀을 취소하라고 강한 권고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강한 의지로 잠시 병환을 극복하려고 했었다.
리사이틀의 클라막스인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연주되고 첫 번째 아다지오 악장이 연주되는 동안 그녀는 마지막 남은 혼혈을 다해 베토벤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감성의 세계를 강인한 타건과 수정과 맑고 깨끗한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었다. 이 연주회 마치고 청중의 열화같은 박수를 받은 후 그녀는 무대를 내려가 다시 무대위에 올라오지 못했고 결국 그녀의 가족들과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968년 3월 31일 향년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