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팔순이 넘은 나이에 머나먼 미국 뉴욕 땅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했던 이 지역의 대표적인 예술인 중의 한 사람 천경자. 결혼 이후 고향을 떠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천경자 화백이 고향에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됐다.
8일 오후 2시 고흥군청 회의실에서 천경자 화백의 큰딸 이혜선(62·섬유공예가)씨와 박병종 고흥군수는 천경자 전시관 설치 협약식을 맺었다. 고흥종합문화회관 1층에 들어설 전시관에는 천 화백의 스케치 작품, 미술도구, 저서 등 50여점의 유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지난 5월 이혜선씨는 경기도 양주시와 장흥관광단지에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한 바 있다.
고흥군은 기존 홍보관으로 사용돼 온 45평의 공간을 이달부터 실내 인테리어 및 작품 설치공사에 들어가 오는 11월 1일 '고흥 군민의 날'에 정식 개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늦어도 11월 중에는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전시관을 개방할 예정이다.
이날 협약식이 끝나고 직접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이혜선씨의 거부로 천경자 화백의 근황 등 궁금한 것은 취재할 수 없었다. 이날 박병종 군수는 훗날을 대비해 천경자 화백의 사후 묘지를 포함한 추모시설 제공도 제안했지만, 이혜선씨로부터 확실한 답변은 듣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 고흥에는 천경자 화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몇몇 지인들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잠시 관내 모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지내던 시절 교내에서 처음 전시회를 가지고 작품도 기증했지만, 지금은 소재를 찾을 길이 없다.
천경자 화백의 고향, 전남 고흥
▲ 팔영산 아래 점암면 성주마을 전경
ⓒ 최경필
이번에 고흥군은 천경자 화백이 태어난 팔영산 아래 점암면 성주마을 입구에 출생지를 알리는 관광안내표지판도 세울 계획이다. 지역 출신 주요인물에 대한 생가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것.
하지만 천경자 화백의 생가는 그동안 몇 차례 이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생가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찾기조차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장품을 전시할 미술관 건립도 중요하겠지만, 그동안 정작 고흥의 대표적인 예술인에 대한 지역의 평가와 고향주민들의 관심이 부족했던 것은 되짚어 봐야 할 점이다.
천경자 화백은 당시 외가인 점암면 성주마을에서 태어나 잠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필자가 지난 2004년 천경자 화백의 고향에 대한 취재에 나서면서 그동안 펴낸 자서전과 친인척, 마을 주민들의 증언으로 확인한 것이다.
현재도 이 마을에는 당시의 그대로 형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와 주택이 남아 있다. 호적상에는 고흥읍 호형리(동촌마을)로 기재되어 있다. 실제 본가는 읍내에 있었지만, 이사를 두어번 해서 집터와 생가 여부는 아직도 불확실한 실정이다. 그동안 생가로 알려진 고흥읍 옥하리는 나중에 읍내로 이사를 한 외가가 있었고, 현재는 헐리고 경찰서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조부의 사랑을 받았던 '짜야', 천경자 화백
▲ 사진 가운데 검은 기와주택이 천경자 화백이 태어난 곳이다.
ⓒ 최경필
▲ 1943년 당시 실제 외조부를 모델로 직접 그린 작품 조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특히 천경자 화백은 외조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당시 외조부는 어린 외손녀를 "짜야"라고 불렀다. 천경자 화백의 원래 이름은 '옥자'였다. 대부분의 인물기록에는 1924년 11월 1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자서전과 가까운 친척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는 1923년 10월 5일생이다. 호적에는 1년 늦게 실렸다.
천경자 화백은 일제강점기 고흥동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를 나와 전남여고(당시 광주공립여고보, 후에 통합하여 광주욱고녀로 개칭)를 졸업했다. 당시 고흥군에서 6명이 입학시험을 치러 3명만이 합격할 정도였다.
전남여고에 진학하기 전까지 고흥에서 성장했다. 또 결혼(당시 전통 혼례)도 당시 동촌마을 생가에서 했고 결혼 직후 전남여고 교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사실상 고향을 떠났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부유했던 외가와 집안의 가세도 기울어졌다. 각종 전시회와 홍익대 교수로 안정된 삶을 찾기 전까지 천 화백은 가난했고 한국전쟁 때 첫 남편의 실종으로 사실상 두 번의 결혼 등 여성으로서 힘든 삶을 살았다.
천경자 화백은 자서전 성격의 수필집을 여러 권 발간했을 정도로 수필가로도 실력을 인정 받았다. <유성이 가는 곳> <언덕 위의 양옥집> <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탱고가 흐르는 황혼>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 <꽃과 색채와 바람> <나의 소녀시절> <남태평양에 가다> 등 펴낸 수필집은 대부분 자서전 형태로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추억, 그리고 결혼 이후 고단했던 삶을 회고하고 있다.
▲ 초등학교(보통학교) 선배를 소재로 한 길례언니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특히 해방 이전의 내용들은 당시 시대상과 고향에 대한 기억, 고향마을과 가족에 대한 애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어 향토사료적으로도 그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 중에 유명한 <길례언니>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보통학교 선배로 당시 소록도병원 간호사였고 그 후 작품에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천경자 화백의 두 동생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4살 터울 누이동생은 1952년 24살에 악성 결핵으로 사망했다. 쌍둥이라 불릴 정도로 서로 닮았고 친하게 지냈던 누이동생의 죽음은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충격이었고 아픔이었다.
누이동생 '옥희'는 서울대 미대에 합격했지만, 해방전 일제학교(광주욱고녀)를 졸업했다는 투서로 합격이 취소됐다. 다시 홍익대에 입학하게 됐지만 결국 병으로 꿈을 펼쳐 보지도 못했다. 남동생도 육사11기 출신(전두환 전대통령과 동기)으로 중령으로 예편하여 지난 2000년에 사망했다.
이국 땅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천경자
▲ 최근 경매에서 12억원에 낙찰된 초원2
천경자 화백의 가족사는 그의 작품에 투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화려한 채색의 작품 속에는 그녀의 고독과 고단했던 삶, 한 여인의 슬픔이 여백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살포시 숨겨져 있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이 어둡고 험난했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쉽고 진솔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K옥션 경매에 나온 작품 <초원2>는 12억원에 낙찰됐다. 지난 해에는 정중헌씨(조선일보 논설위원)가 천경자 평전 <천경자의 환상여행>을 펴냈고 중앙M&B가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그동안 펴낸 수필집을 재발간하는 등 노 화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시도되고 있다. '인간 천경자'에 대한 미술애호가들의 관심과 사랑이 식지 않고 있는 것.
이제 실제 나이 84세이고 2003년 뇌출혈로 쓰러져 언어소통과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한다. 병의 원인은 지난 1991년 <미인도> 위작시비 사건으로 얻은 충격으로 전해진다. 당시 천경자 화백은 위작이라고 주장했고 소장했던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는 진품이라고 맞섰지만, 8년만에 위조범 권모씨가 자백하면서 사실상 일단락됐다.
노 화가는 고향을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얽힌 가족사와 부유했던 집안의 퇴락으로 마음 편하게 고향을 찾아가지 못했다. 화가의 자존심으로 영글어진 작품의 가치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주변의 공짜 작품 요청도 고향에 대한 애증과 함께 적당한 거리를 두도록 작용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고향이 그리워 찾았지만, 지인들을 만나지 못하고 홀로 조용히 소록도만 둘러보고 가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70~80대의 마을 노인들은 아직도 천경자 화백이 아닌 인간 '옥자'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디 병을 떨치고 다시 일어서 추억이 서린 고향의 푸른 산천과 벗들을 다시 만나기를 빌어본다.
천경자 화백의 건강과 회복을 기원합니다.
■ 천경자님 작품 ■
전생에 자신은 황후였다는 여자가 있습니다.
소녀 시절에 스스로 지어 붙인 “경자”라는 이름을 자신의 본명인 “천옥자” 앞에 두었지요.
그 뒤 그 이름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 외로움들을 신비롭게 표현할 줄 아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여류화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어려서부터 독특한 감수성을 가지고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녀가 자랄 당시 대부분의 여자는 소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일제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천 화백은 교육과 문화에 열린
가정환경 덕분에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지요.
고등학교를 마칠 때 즈음 집안에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을 공부하고 싶었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물론 집안의 반대가 심각하였지요.
천 화백은 정신병자 흉내를 내면서까지 부모님께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습니다.
미친듯이 웃다가, 울기도 하고, 중얼거리면서 집안을 돌아다녔지요.
결국 부모님은 허락하셨고, 그녀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동경여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천 화백은 유학 중 만난 남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다시 신문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을 만났지만 곧 헤어졌습니다.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쉽지 않았던 인생의 고개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 쉽게 식지 않는 예술혼을 잉태한 것입니다.
“나물 캐러 갔던 동네 소녀가 허리띠인 줄 알고 꽃뱀을 집으려다가 물려 죽은 일이 있었어요.
무서우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끌리는 그 장면이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남아 언제가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지요.
그러나 내가 처음 그린 뱀은 꽃뱀이 아니라 한 뭉텅이의 푸른 독사였어요.”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그녀가 자신의 삶에 저항하기 위해 택한 소재가 뱀이었습니다.
그녀는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뱀에 대한 이미지를 탄생시켰습니다.
6.25로 인하여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천 화백은
그 곳에서 자신이 그린 뱀 그림 전시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뱀을 그렸다’면서 신기해하였구요.
그것이 “천경자”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한 것입니다.
또한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꽃과 여인입니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것이 꽃과 여인이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아름다움이 주로 보여지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외롭기도 하고 슬퍼보이기도 하지요.
고독의 미와 아픔의 성숙이 천경자의 예술을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던 1974년, 18년간 재직하던 홍익대 교수직을 버리고, 문득 천 화백은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남태평양과 유럽, 남아메리카까지 계속되었지요.
그곳을 돌아보고 그 여행에서 느낀 선명한 색감과 원시적 인상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반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보여졌던 안타까운 인간의 또 다른 모습들을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에 비추어서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얼마 전이었던 1991년 천 화백은 힘든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의 “미인도”에 대한 진품 시비 사건 때문이지요.
천 화백은 끝까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많은 감정사들이 그녀의 작품이라고 판결하였고,
입장이 난처해진 미술관에서도 천 화백의 작품이라 주장하였지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천 화백은 자신의 작품들을 서울 시립 미술관에 기증하고,
큰 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뒤 진품 위조 사건은 범인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천 화백은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은 채
지금도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중남미를 여행하고 있다고 하네요
[ 자살의 미 (1968) ]
누구보다 많은 열정을 품었기에 또한 그만큼의 한(限)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여인.
그녀의 인생에 자살이란 단어가 들어왔을 때 느꼈던 나름대로의 차가운 미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잿빛 푸른 색으로 그려진 꽃과 구름으로 자살이라는 가장 극한 감정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 청춘의 문 (1968) ]
천경자 화백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 중 하나 이지요.
죽은 사람인양 회색빛 여인의 얼굴은 꿈을 꾸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그녀의 얼굴은 전통적 한국 여인과는 다르지요.
환상적인 여인의 얼굴과 분위기에서 천화백이 바라는 이국에의 동경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천 화백의 꿈이자 이상인 듯 합니다.
[ 꽃과 나비 (1973) ]
한 무더기 아름답고 화려한 꽃다발 아래에 반라의 여인이 한가롭게 누워있습니다.
그녀의 피부색은 그녀가 여기 한국의 사람은 아니라고 느끼게 하고 있네요.
그리고 화려한 공작새와 꽃들도 먼 이국의 정서를 물씬 풍기게 합니다.
여느 천 화백의 그림처럼 색감과 구성이 화려합니다.
[ 이탈리아 기행 (1973) ]
1960년대 말에 시작된 천 화백의 유랑은 많은 작품의 소재를 만들었습니다.
1969년에 갔던 이탈리아에 대한 감흥을 3년 동안 이 작품으로 완성하였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열었던 보티첼리의 그림과 멋진 건축물이 찍힌 사진,
여인의 장갑 그리고 양주병과 꽃으로 화폭을 채웠습니다.
몇 안 되는 소재들이지만 화려하게 표현된
이 작품으로 그녀는 자신의 느낀 이탈리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孤 (1974) ]
머리에 가득 꽃을 꽂은 이 여인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 큰 눈과 처연한 입술의 끝은 한없이 슬퍼보입니다.
무심한 듯 허망한 듯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그녀의 짙은 피부색보다
더 내 가슴을 더 막막하게 합니다.
늘상 외로움을 품고 살았다는 천화백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덧입혀주었습니다.
[사월 (1974) ]
1974년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그린 그림 속 갈색 피부 여인의 머리칼에는
연보랏빛 등꽃들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사월의 신비로움과 화사함이 꽃잎 끝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네요.
강렬한 호랑 나비의 무늬보다 여인의 연보랏빛 입술에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은 왜일까요.
[ 인도 올드 델리 (1979) ]
올드 델리는 수 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많은 성곽들과
모스크,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인도의 오래된 도시입니다.
우리의 옛 시골 장터처럼 형성된 올드 델리 길가의 사람들의 모습을 풍경화로 담아내었네요.
인도의 전통 의상인 사리를 입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이국적 정서를 느끼게 됩니다
[ 뉴욕 센트럴 파크 (1981) ]
맨하탄 중심부에 있는 센트럴 파크는 뉴욕을 대표하는 공원이지요.
그 곳을 대표하는 공원을 그리면서 자신이 느꼈던 또 다른 이국의 정서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네요.
한가로운 공원의 한 켠에는 다람쥐가 놀고 있구요,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는 또 다른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의 가지들이 배경을 가득 채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 두상 (1982) ]
너무나 강하고 화려하여 슬프고 애처로운 이 그림은 천경자 화백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지요.
그녀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슬픔의 애상에서 시작된 것임을 뼈 속 깊이 사무쳐 느끼게 하지요.
쏟아지는 꽃비 속, 처연한 눈망울의 여인은 차가와 보이지만 사랑이 필요한,
누군가를 바라고 있는 천 화백의 또 다른 얼굴인 듯 합니다.
[ 황금의 비 (1982) ]
황금색 꽃들이 비처럼 내리고 있는 공간.
그 속에 있는 갈색 피부의 여인이 아름답습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내 자산의 가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인상적이지요.
그녀의 인상은 너무 강렬해서 그림을 내려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천경자는 1924년에 태어나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수학하였다.
1955년 대한 미협전 대통령상과 1983년 은관 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천경자의 그림은 그 자신의 생활감정을 포함하여 자연의 아름다움,
생명의 신비, 인간의 내면세계, 문학적인 사유의 세계 등 폭넓은 영역을 포괄 한다.
그는 해방 이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명으로서 우뚝하다.
더구나 채색화를 왜색풍이라 하여 무조건 경시하던 해방 이후
60년대까지의 그 길고 험난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채색화 붐이 일고 있는
오늘을 예비했던 그 확신에 찬
작가정신으로 말미암아 그의 존재는 더욱 확고하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심적인 이미지로 떠오르는 꽃과 여인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통한다.
일상적인 감정을 그림 속에 그대로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체험적인 인식의 산물이기도 하다.
꽃과 여인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상징성을 내포한다.
일상적인 생활감정 뿐만 아니라, 속내를 은유적이고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