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7세기 네덜란드 미술
17세기 유럽전역에서는 바로크의 궁정풍 문화가 유행했으나 네덜란드에서만은 시민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술이 전개되었다. 도시국가 연합을 형성하고 있던 홀란드 북부의 자유도시국가들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국가의 부는 국가나 왕정에게 돌아가지 않고 시민계급이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의 구속에서 벗어난 네덜란드에서는 그 주제에 있어서 성화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소재들의 묘사, 풍속화, 초상화, 풍경화, 실내화, 건축화 등이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스케일 역시 궁정이나 교회가 아닌 개인의 일상생활의 용도에 맞는 조그만 규모였다. 따라서 조형예술 중에서도 가장 겸손한 예술인 회화, 또 그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형식인 내실 장식용의 소형그림이 지배적인 장르가 되었다.
할스 Hals, Frans (1581?~1666.9.1)네덜란드의 화가. 안베르스 출생. 1591년경 하를렘으로 옮겨 카레르 판 만델에게 사사하고 1616년경 최초의 작품 《성(聖)조르조시(市) 수비대 장교들의 연회》를 그려 초상화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대담한 필치로 모델의 감정과 심리를 교묘하게 묘사함으로써 초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40년경부터 작풍이 변하여 색채가 어둡고 표현이 억제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시기에 활약한 렘브란트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은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만년은 불우하여 양로원에서 죽었다. 주요작품으로 《웃고 있는 기사》 《니콜라스 하셀라르》 《팔장을 끼고 있는 사람》 《집시여인》 등이 있다. 하를렘에는 국립의 ‘프란스 할스미술관’(1913 개관)이 있어 그의 주요작품을 비롯하여 플랑드르·네덜란드파 전반에 걸친 작품이 수집·전시되어 있다. |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네덜란드의 화가. 레이덴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이다.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레이덴대학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레이덴의 화가인 야콥 반 스바넨부르크에게 배우고, 이어 암스테르담에 나와 P.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년 레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32년까지 완전한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32년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프 박사의 해부》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 후 약 10년 간은 생활이나 명성에 있어서도 가장 혜택받은 시기였다. 34년 명문가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혼인하여 당시의 세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 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수입과 제자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따라서 42년의 명작 《야경(夜警)》의 제작을 고비로 갑자기 세속적 명성에서 멀어졌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의 주문에 의한 단체초상화인데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촬영적 단체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다. 더욱이 이해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음으로써 인기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그의 생활은 차차 고통스럽게 되었으나,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사스키아의 유아(遺兒) 티투스의 성장과, 45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키에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여, 오늘날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부분은 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56년 파산선고를 받아 일찍이 사스키아와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구입한 저택도, 예술적 영감을 한없이 자극하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62년에는 헨드리키에가 세상을 떠나고, 68년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월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에칭·소묘로, 종교화·신화화·초상화·풍경화·풍속화·정물화 등 모든 종류에 걸쳐 있으며, 중년 이후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으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더구나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그는 그 나름의 깊은 빛과 그늘을 창조하였다. 즉 그의 작품에 있어서 색이나 모양이 모두 빛 그 자체이며, 명암이야말로 생명의 흐름이었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네덜란드의 시정생활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 특유의 명암법 때문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인간애 정신이 넘치고 있어, 그가 그리는 작품은 한없는 따뜻한 애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약 100점)을 그린 사람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가 설혹 유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에칭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상 최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에칭의 모든 기술은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엠마오의 그리스도:Christ at Emmaus》(1628) 《야곱의 축복》 《유대인의 신부(新婦)》(유화) 《세 그루의 나무》 《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3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에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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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달 Ruysdael, Jacob van (1628?~1682.3.14)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하를렘 출생. 풍경화가로 유명한 로이스달가(家)의 일원으로, 아버지 이사크와 삼촌 살로몬(1600?∼70)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648년 하를렘의 화가조합에 등록되었고, 57년경부터 암스테르담에서 화가로 제작에 몰두하는 한편 의사로도 활약하였다. 작풍(作風)은 50년대 중간쯤부터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하늘·물·대지가 일체를 이룬 네덜란드의 독특한 것으로 고사(枯死)한 거목(巨木), 폐허·묘지나, 산의 성채 등을 배치한 우울하고 극적인 것이었다. 화가의 개인적 감정을 풍경화에 반영시킨 최초의 화가로, 이것은 근대 로맨티시즘을 낳은 근원적인 세계였다. 예를 들면, 대표작 《유대인의 묘지:Jewish Cemetery》(60)는 황량한 계곡 위에 떠 있는 번개구름, 중세의 폐허와 고대의 묘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침울한 기분을 자아낸다. 이것은 단순한 서정적 표현을 초월한 것으로, 눈에 들어오는 모든 지상적 사물의 덧없음을 암시하면서, 배후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어떤 풍경화보다 뛰어나다. 주요 작품으로는 《하를렘의 전망》(60) 《풍차:Windmill at Wijk bij Duurstede》(6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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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스테엔 (Jan Steen, 1626 ~ 1679) 브뤼겔에 이어 중세기 세밀화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유쾌하고 소박하게 묘사하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완성 작품 : <세례잔치>,<니콜라스제의 전날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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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 (Jan vermeer van Delft, 1623 ~ 1675) 유머러스한 도해적 설명이 있는 풍속화가 아닌, 오히려 인간이 들어 있는 정물화라고도 할 만한 시간이 없는 세계의 표현. 질감, 색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등, 부드러움과 정확성의 불가사의 하고 독특한 조화로 걸작이 됨. |
18. 로코코 미술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조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로코코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상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코코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로코코는 사실 돈 많고 권태로와진 향락가들을 위한 하나의 애로틱한 예술이다.
이 시기에는 여성미의 이상 자체가 달라져서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정교한 것으로 되었다. 또한 로코코는 서구 최후의 보편적 양식이다. 반면 같은 시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파리의 로코코 양식과는 대조적인 후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지어졌다.
와토 ( Antoine Watteau 1684 ~ 1721) 18세기 초 화가들의 우상 숭배 인물은 빛, 색채, 움직임, 환희 등 아카데미가 싫어했던 모든 것을 갖춘 루벤스였다. 흐르는 듯한 필법과 화려한 색채대비등을 루벤스에게서 물려받은 와토의 그림은 반아카데미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카데미는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와토의 그림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페트 갈랑트, 즉 우아한 축제라느 새로운 범주가 와토에 의해 창안되었는 데, 이것은 공원풍의 배경에서 희극 배우와 재미있게 노는 젊은 귀족들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공원의 연회> 은 아름다움의 환성속에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데, 그것은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와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아마도 이는 그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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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 (Jean-Baptiste Siemon Chardin 1699 ~ 1779) 18세기 귀족풍의 몽상적 세계가 퇴조하고 보통사람들의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한 샤르댕은 이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평범한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공간 질서에 대한 명쾌한 감각을 보여주는 샤르댕은 풍속화가인 동시에 정물화가였다. <주방정물>에서 보듯이 그가 그린 대상은 꾸밈없는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존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를 떠받들고 있다. 그는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을 느껴 화폭에 담았으며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과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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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드 (William Hogath 1697 ~ 1764) 윌리엄 호가드는 뛰어난 초상화가였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생활의 장면에 있었다. 그는 청교도적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선의 보상과 악의 대가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하였다. <소란스런 술잔치>은 '방탕아 편력'이라는 그림 시리즈의 3장면이다. 그림을 통해 설교를 하고자 한 것은 호가드의 시대에 이미 대중미술속에 존재하였으나 호가드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붓을 사용하고 빛과 색을 배합하는 것, 인물의 배치 등에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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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인즈 보로(Thomas Gainsborough 1727 ~ 1788) 영국이 낳은 위대한 초상화가 게인즈보로는 이탈리아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기 보다는 타고난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그린 <로버트 앤드류스 부부>는 영국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시돈즈 부인>는 싸늘한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게인즈보로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그의 그림에선 와토와 같은 어두운 색조의 섬세함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는 인기는 없었으나 <시골풍경> 풍경화를 그리는 것도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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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드 경 (Sir Joshua Reynolds 1723 ~ 1792) 18세기 영국 상류사회를 만족시킨 화가, 레이놀드 경은 게인즈보로와는 다르게 이탈리아 거장을 연구하고 모방하라는 카라치의 교훈을 받아들였으며, 게인즈보로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 반다이크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 믿었던 레이놀드 경은 지식인이었으며 상류사회의 생활을 했다. 또한 상류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그는 초상화를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려 하였다.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을 보면 아이의 성격과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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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셰 (Francois Boucher) 그는 대단한 화가라기 보다는 예술적 관습의 대표자로서 '징세청 부인'과 '신흥부자들' 및 자유주의적 궁정인사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에로틱한 장르 그림의 대가이다. 그는 와토의 "페트 갈랑트"다음으로 로코코 회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연애신화의 창조자이다. 또한 에로틱한 주제를 공예 미술로 확장하여 국민적인 양식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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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완 (Jean-Antoine Houdon 1741 ~ 1828)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미술가 이자 조각가인 앙투완은 베르니니가 시작한 전통을 이어 받았다.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 <볼테르 상>에선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있는 지성을 엿볼 수 있다. |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1732 ~ 1806) 게인즈보로와 같이, 프랑스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측면에 대한 취향을 표현한 작가 프라고나르는 와토의 전통을 따르는 화가였다. <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넓은 정원>을 보면 놀라운 효과를 구사하는 그의 솜씨를 볼 수 있다. |
19. 신고전주의
1. 개념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등이 우선시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 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2. 역사적 배경과 그 성격
루이 15세와 16세의 통치기간에 이르는 시기가 그 주요 연대로서 전대의 태양왕의 철저한 섭정이후 혼란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시기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운과 전대의 화려한 정치 성향의 귀족, 의식이 싹트는 시민계급의 성장의 정치적 위기, 한편 현대를 예고하는 계몽주의 사상의 성장이 혼재 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과 개개인의 자유, 애국심들이 얽힌 감정의 출구가 필요했다. 예술계에서 신고전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은 그들의 이상에의 갈망을 행동과 사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미술에 나타난 주조는 신고전주의의 경우 "고전미"가 그 흐름의 주요 성격에 보이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새단장은 고전주의의 복귀로 그 성격을 드러낸다. 특히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그 아름다움은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로 칭송받으며 1775년 빙켈만의 「그리이스미술 모방론」이란 저서에서 그 이상미가 재평가 받는다.
그 결과 고대에의 관심을 팽배하였고, 고대의 특징 즉, 명석한 판단에 따른 절제되고 철저한 정확성은 혁명정부가 바라던 이상을 적확하게 구현시키기에 알맞았다.
로코코시대가 취한 과도한 사치와 화려는 혁명정부의 첫 번째 숙청과제였기 때문이다.
순수하되 명확하고 강직한 선, 균형과 조화, 안정과 형식미의 존중은 고전주의를 계승하는 신고전주의가 취한 특징이다.
오히려 더 완강하고 절제된 선과 색으로 더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크 시대의 연장선 상에서 Poussain적인 회화의 계승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주제에 드러나 확실한 정치적 의지에 근거한 의도적인 소재, 더 철저하고 절제된 선묘는 더욱 심화된 고전미를 나타낸다.
한편 공간의 압축화, 실제 사건의 주제화 등은 신고전주의의 특징이자 마지막 고전주의자인앵그르에 드러나는 동방취미, 왜곡된 표현은 시대에 부합하는 취미 변화의 반영이자 '낭만정신'이 깔린 기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써 새로운 미의식의 예고라 할 수 있겠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작가로서 나폴레옹의 선전작가이자 신고전주의의 실제적인 구체적 실현을 이룬 예술가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브루터스와 그의 죽은 아들' 등은 고대에서 빌어온 주제로서 정의 실현을 위한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 표현된 공간은 고대의 확장된 공간미를 넘어선 오히려 압축된 공간의 사용으로 연극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고전미와 더불어 현대적인 요소로의 전환이 드러나고 있다. 또 '마라의 죽음' 등에서 나타난 실제 사건의 주제화는 은유와 비유를 통한 고대 신화를 한층 더 대범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배경은 그 죽음의 비장미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그 죽음을 영욱적이고 숙엄한 주제로 끌어 올리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비롯된 주제만큼은 엄격을 거부하고 '존재하는 모든 다양성의 수용'(로잘린 크라우스)을 보이는 예라 하겠다. '룩상부르 공원'은 그가 수감생활 중에 그린 유일한 풍경화로 정치가 내제한 그 이전의 회화세계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즉 있는 실재의 공원의 모습은 안정적인 자연의 일면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고전적인 안정감과 덧붙임 없는 재현은 고전주의와 근대성의 새로운 이상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제국이 망하고 추방되어서도 신고전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로 이어서 그 정신을 잇고 있다. 앙트완느 장 그로(1771~1835)는 <아르콜 전장의 나폴레옹>에서 낭만적인 모습에 신비감과 영웅의 모습을 동시에 그려 천재성을 인정받으나 그의 감정적인 낭만 기질은 끝내 두 사조간의 갈등을 자살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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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 (Jean Augui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David가 신고전주의의 실현자라면 Ingres는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David가 갖고 있던 정치성을 지우고 펄저한 미의 구현에 매진한다. 그는 바로크 선상에서 이어진 푸생적인 미의 계승자로서 루벤스 정신의 계승인 낭만주의에 맞선 마지막 고전주의자가 된다. 그는 소묘가 채색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여 정확한 사생의 훈련을 부르짖었다. 즉 즉흥과 무질서를 경멸하도록 가르치며 실제로 그의 작품은 대체로 채색사용에 인색하다. <오달리스크>는 그가 자주 그린 소재이다. 그의 재능은 "물리적인 정확성과 심리적인 통찰력"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고전미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게 하였고 수많은 여인의 누드에서 그 미학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정확한 묘사력을 가진 그가 꾀한 오달리스크의 신체의 왜곡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소묘력은 결국 수단이며 근본적인 미, 즉 아름답게 보이는 방식에 관심이 여인의 누드에 집중 되었을 때 관능미를 주목하고 그것의 부각은 왜곡된 신체미로 오히려 더 이상적인 효과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저변에는 이미 이국적인 소재, 오리엔탈리즘의 경향 등을 통한 이상향의 실현이 낭만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도치적인 소재의 이상미 추구는 결국 낭만 정신의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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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낭만주의
일정한 사조라기보다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전주의의 관습화, 궁정적 귀족적 기교의 수사학에 결별을 고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비역사적, 비변증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들은 역사발전은 그 근원이 형식원칙이나 이념, 실체나 본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정법적 과정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동적인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는데 우리와 우리의 문화가 끝없는 흐름 속에 있고 간단없는 투쟁 속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정신적 삶이란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에서 도피처를 찾는 그들은 과거를 자신들의 모든 희망과 꿈을 충족시켜 주는 장소로 만들었고 이 도피처로부터 이념과 현실, 자아와 세계, 개인과 사회의 모든 긴장을 추방하였다. 유토피아와 동화, 무의식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무시무시한 것과 신비스러운 것에로의 도피, 꿈과 광기에로의 도피, 유년시절과 자연에의 도피는 현실에서의 책임과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심각함을 이어받으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는데 자연을 더 면밀히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와 매일매일의 사건, 감정에 몰입하기도 한다.
고야 (Farancisco de Goya Lucientes 1746 ~ 1828) 과거의 인습을 벗어나 독립성을 주장하였으며 초상화나 「카프리쵸스」에칭 시리즈와 같은 새로운 주제의 에칭 등의 작품을 남겼다. 1793년 중병을 앓은 후 귀머거리가 된 그는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칩거하여 그의 상상 속에 모여드는 유령 등에 사로잡히게 된다. <전쟁의 참담>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끔찍한 고통과 고문을 보여준다. (거인1808~1812) 스페인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때로 거인은 프랑스 침략에 대항하는 스페인의 저항정신을 표상할지도 모르나 그림 속의 인물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전쟁의 참상을 대하면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무능함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자화상) 그를 돌보아 주는 아내의 팔에 안겨 있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은 어두컴컴한 뒷배경에는 악마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다. 그의 병적인 강박관념이 나타난 '블랙페인팅'으로 넓게 칠해진 때로는 붓보다 나이프를 더 많이 사용하여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로 그려진 작품들은 20C 표현주의의 원시적 비관주의를 예고한다. |
1. 영국과 미국의 낭만주의 풍경화
풍경화는 당시 유행하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운동과 장 자크 루소, 그리고 영국 호반시인의 영향 때문이었다.
실제의 전원을 의도적으로 때로는 자의적으로 감상하는 경치관광여행의 점진적인 유행은 회화와 판화의 수요를 늘게 했다. 여행과 스케치에 인기 있던 장소는 영국의 '황량한' 지역 산맥과 황무지, 사람이 살지 않는 언덕의 폐허들이었다.
컨스터블 Constable, John (1776.6.11~1837.3.31)영국의 풍경화가. 제분업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왕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02년 아카데미전에 입선하였으나 곧 고향으로 돌아와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화풍은 자연에 대한 관찰이 섬세하고, 영국 특유의 소박한 풍물을 묘사하였으며 밝은 색채감을 나타냈다. 특히 초록색의 발견자로서 근대 풍경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감각은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프랑스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건초 수레》 《솔즈버리 대성당》 등이 있다. |
터너 Turner, Joseph Mallord William (1775.4.23~1851.12.19) 영국의 화가. 런던 출생. 14세 때부터 로열 아카데미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이듬해 아카데미 연차전(年次展)에 수채화를 출품하였다. 그는 주로 수채화와 판화 제작으로 일생을 보냈는데, 20세 무렵에는 유화를 시작하여 풍경유채화를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R.윌슨을 비롯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내 여행에서 익힌 각지의 풍경을 소재로 삼았다. 24세 때에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고, 3년 후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02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풍경화의 소재를 모아 500점이나 되는 스케치를 남겼다. 한편, 이 무렵부터 N.푸생, C.롤랭의 고전주제적 풍경화에 끌려, 특히 구도를 잡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20년 전후부터는 그의 양식에 변화가 생겨, 자연주의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낭만적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19년 T.로렌스의 권유에 따라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색채에 밝기와 빛을 더하게 되었다.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1838) 《수장(水葬):Peace:Burial at Sea》(43) 《비·증기·속력》(44) 《디에프항》 《노럼성과 일출》 등의 대표작은 그의 낭만주의적 완성을 보여준다. J.라스킨의 절찬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주목받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망명해온 그 후의 인상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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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일의 낭만주의
독일 낭만주의는 풍경화, 상징주의, 민족적 중세주의의 세가지 양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시각적 강렬함에서는 영국과 가깝고, 더 엄숙한 성격을 띠고 뚜렷하게 종교적 주제 다루었다.
프리드리히 Friedrich, Caspar David (1774.9.5~1840.5.7)독일의 화가. 그라이프스발트 출생. 드레스덴에서 죽었다. 처음 코펜하겐에서 배웠으나, 1798년 이래 드레스덴에서 활약하고, 1816년 그곳의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다. 가장 순수하게 독일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풍경적인 제재(題材)에 시종하여, 특히 가을·겨울·새벽·안개·월광 등의 정경을 독특한 정적감(靜寂感) 속에 표현하였다. 작풍은 드레스덴 이외로는 거의 전파되지 않아서 독일화단에서도 잊혀졌으나, 20세기 초 이래 재평가되어 오늘날에는 19세기 전반의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힌다. 작품은 드레스덴·베를린·함부르크 등지의 미술관에 많은데, 거의가 초기·중기의 것으로 만년의 작품은 오히려 러시아 각지에 산재되어 있다. 산중의 십자가》 《북극의 난파선》 등의 작품이 전하며 그의 글도 《고백록 : C.D.F.Bekenntnisse》(1924)으로서 출판되었다. |
3. 프랑스 낭만주의
제리코 Gericault, Jean Louis Andre Theodore (1791.9.26~1824.1.26) 프랑스의 화가. 루앙 출생.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년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뒤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또 P.P.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6년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후 대작 《메두사호(號)의 뗏목》(1819)을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등 실감을 살린 이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등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그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20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또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그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독립전쟁·노예제 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22년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이 밖에 주요작품에 《돌격하는 샤쇠르》 《부상당한 퀴라시에》 등이 있으며 약간의 조각작품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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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 Delacroix, Ferdinand Victor Eugene (1798.4.26~1863.8.13) 프랑스의 화가.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 출생.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제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콘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 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파르의 죽음》(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31)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33), 국회 하원도서관(44), 국회 상원도서관(45∼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49∼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27) 《햄릿 석판화집》(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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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에 Daumier, Honore Victorin (1808.2.20~1879.2.11)프랑스의 화가·판화가.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32년 국왕 루이 필립을 공격하는 정치풍자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그리고 40세경부터는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유화나 수채화 연작을 시도, 날카로운 성격묘사와 명암대조를 교묘히 융합시킨 이색적인 화풍으로 《세탁하는 여인》 《3등열차》 《관극(觀劇)》 《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
코로 Corot, Jean-Baptiste-Camille (1796.7.16~1875.2.22)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처음에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1822년부터 미샤롱과 베르탱에게 사사하여 그림을 공부하였다. 25년부터 2년간 동경하던 이탈리아에 유학, 자연과 고전작품을 스승으로 한 정확한 색가(色價)에 의한 섬세한 화풍을 발전시켜, 27년 《나르니다리》로서 살롱에 등장하였다. 그 후는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을 비롯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다. 《샤르트르 대성당》 《회상》 등이 유명하며, 풍경화 이외에도 《진주의 여인》 《푸른 옷의 여인》 《샤르모아 부인상》 등이 있다. 코로의 작품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채조(彩調)를 쓰면서 우아한 정경을 드높여 주어, 단순한 풍경에도 시와 음악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특색이다. 동시에 착실한 관찰자로서 자연을 감싸주는 대기와 광선의 효과에도 민감하여, 빛의 처리면에서 훗날 인상파화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