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창포49 2011. 12. 14. 01:17

 

(소상팔경도)

 

▲ 작가 미상, 소상팔경도(조선 1539년, 각 98.3 x 49.9cm. 일본 다이겐지)

 

▲ 제1경 산시청람

 

▲ 제2경 연사만종

 

▲ 제3경 어촌석조

 

▲ 제4경 원포귀범

 

▲ 제5경 소상야우

 

▲ 제6경 동정추월

 

▲ 제7경 평사낙안

 

▲ 제8경 강천모설

 

 

조선시대 회화사는 155년 중종 연간까지를 초기,이후 1700년 숙종 연간 까지를 중기.

그 이후를 후기로 시대 구분하고 있다.

초기와 중기를 가르는 화풍상 큰 차이는 초기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풍의 산수화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중기에 들어와서 절파(浙派) 화풍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소상팔경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조선 초기의 산수화를 말할 수 없다.

소상팔경도란 동정호(桐庭湖)의 남쪽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이른 봄부터

늦은 겨울까지 여덟가지 주제로 그린 대단히 서정적인 그림이다.

북송의 송적(宋迪)이 처음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 사계산수의 대명사가 되어 뭇 화가와 시인들이

이를 따라 그리고 시로 읊었다.

 

초 봄 : 산시청람 山市晴嵐 푸른 기운 감도는 산마을

늦 봄 : 연사만종 煙寺晩鐘 안개 낀 절의 저녁 종소리

초여름 : 어촌석조 魚村夕照 어촌의 저녁노을

늦여름 : 원포귀범 遠浦歸帆 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배

초가을 : 소상야우 瀟湘夜雨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늦가을 : 동정추월 洞庭秋月 동정호의 가을 달

초겨울 : 평사낙안 平沙落雁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

늦겨울 : 강천모설 江天暮雪 저녁 무렵 산야에 내리는 눈

 

소상팔경도는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하여 일찍이 고려 명종 때 이인로가 이를 시로 읊은 바 있으며,

안평대군이 주도하여 꾸민<소상팔경시첩>은 보물 제1405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견 그림으로 전칭되는 화첩이 있고,국립진주박물관에는 김용두 씨가 기증한 조선 초기 8곡병풍이 있다.

전경원의<동아시아의 시와 그림, 소상팔경>에서는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소상팔경 관련 시가 600여수나 소개되었다.

조선 초기 소상팔경도는 일본에 그대로 전파되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조선의 발달된 문물을 수입하기 위하여 다이묘(大名) 번주(藩主) 사찰 등에서 수많은 상인, 승려, 화가들을 조선에 보냈다. 그 결과 소상팔경도를 비롯한 조선 초기 그림들이 일본에 상당수 전해졌으며 일본의 화가들도 비슷한 화풍의 소상팔경도를 많이 남겼다.그런데 당시에는 도서낙관을 분명히 하거나 화가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남기지 않아 국적을 밝히기 힘든 작품도 상당수 있다.그런 중 일본 히로시마의 다이겐지(大願寺)라는 고찰에는 명백한 조선 초기 소상팔경 8곡병풍이 전해지고 있다.

병풍의 뒷면에 손카이 라는 승려가 1538년에 대장경을 구하러 조선에 왔다가 이듬해에 귀국하면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각 폭이 대각선 구도로 되어 있어 두 폭을 마주 대하면 쌍을 이루고 전경, 중경, 원경이 명확히 나뉘어 있으며 절벽 위에는 예외

없이 쌍송과 정자가 있고, 곳곳에 시회를 하는 인물들이 점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1경 산시청람에선 안개가, 제3경 어촌석조에서는 노을이,제5경 소상야우에서는 비바람이, 제8경 강천모설에선 흰 눈이 강조

되면서 사계산수의 멋과 운치를 한껏 보여준다. 필치엔 강한 묵법보다 부드러운 선묘가 많이 구사되어 화면 전체에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서정이 일어난다.

 

소상팔경은 이처럼 시정 넘치는 풍광을 묘사하고 있어 동정호수의 소강과 상강의 풍경을 넘어 서정적인 관념산수의 정형으로 발전했고, 조선 초기 산수화는 이를 바탕으로 발전하여 심지어는 계회도(契會圖)까지도 그 일부를 차용할 정도였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가 발달하면서 소상팔경도라는 관념산수는 후퇴했지만 이 전통은 사라지지 않아 판소리 춘향전과 민화에도

등장한다. 근래에 일본에 있는 조선 초기 그림들이 국내로 많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 병풍만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돌아올 길이 막혀버려 지금도 이역의 산사에 고이 잠든 채

조선 초기 소상팔경도 화풍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