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스크랩] 사청사우(乍晴乍雨)-김시습

창포49 2010. 5. 6. 11:34

 



乍晴乍雨

(사청사우)
개었다가 다시 또 비 내리네

乍晴乍雨雨還晴

(사청사우우환청)

잠깐 개었다 비 내리고 내렸다가 도로 개이니

天道猶然況世情

(천도유연황세정)

하늘의 이치도 이러한데 하물며 세상 인심이야

譽我便是還毁我

(예아편시환훼아)

나를 칭찬하다 곧 도리어 나를 헐뜯으니

逃名却自爲求名

(도명각자위구명)

명예를 마다더니 도리어 명예를 구하게 되네

花開花謝春何管

(화개화사춘하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을 봄이 어찌 하리오

雲去雲來山不爭

(운거운래산불쟁)

구름이 오고 구름이 가는 것을 산은 다투질 않네

寄語世人須記認

(기어세인수기인)

세상 사람에게 말하노니 반드시 알아두소

取歡無處得平生

(취환무처득평생)

기쁨을 취하되 평생 누릴 곳은 없다는 것을

 

 


 

김시습(金時習;1435-1493) 

조선 초기 학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

본관은 강릉(江陵). 태어날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3살에는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소학(小學)》 등도 읽어 그 뜻을 통달했다 한다.

5세 때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 문하에서 글재주가 더욱 무르익었으며, 세종대왕 앞에서 글을 지어 올리니

왕이 감탄하여 칭찬하고 비단을 선물로 내렸다.

15세 때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짓고 3년상을 치른 뒤

1455년(세조 1)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나흘 동안 두문불출 단식한 뒤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방랑길에 올랐다.

1458년(세조 4) 관서지방(關西地方)의 유람을 마치고 《탕유관서록후지(宕遊關西錄後志)》를 썼으며,

1460년(세조 6) 관동지방(關東地方)의 유람을 끝내고 《탕유관동록후지(宕遊關東錄後志)》를 썼다.

또 1463년(세조 9) 삼남지방(三南地方)을 유람한 뒤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지었다.

그해 효령대군(孝寧大君;世祖의 叔父)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서울을 떠나 경주로 내려가 남산(南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여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창작하였다. 2년 뒤 다시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 금오산에서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고,

1476년(성종 7)에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썼다.

1481년(성종 12) 47세로 환속(還俗)하여

1485년(성종 16)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썼다. 한평생 절개를 지키며, 불교와 유교의 사상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한세상을 풍미하다가

1493년(성종 24) 59세로 생애를 마쳤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금오신화(金贅新話)》 《매월당집(梅月堂集)》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등의 저서가 있다.

시호는 청간(淸簡).(웹발췌)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현월(顯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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