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1797-1828) 는 27세인 1824년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또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나의 슬픔의 표현입니다.
슬픔으로서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하고 정신을 굳세게 해줍니다." 라고 쓰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아무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던 자기의
허약한 건강을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유명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의
가곡집 이라든가,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a단조 (작품 143) 등의
걸작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해인 1824년 여름에 슈베르트는, 에스테르하찌 일가와 함께, 쩨레스로 갔었다.
그는 여기서 오래간만에 상쾌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마 슈베르트의 실내악곡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한 가장 다정스러운 정취가 풍부한 현악 4중주곡 a단조 가 만들어진 것도, 이 해 여름의 일이었다.
백작의 딸인 '카롤리네와'의 사이에 로맨스가 싹튼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슈베르트는 여섯살 쯤 젊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쩨레스는 헝가리의 향토색이 짙었으며, 그래서 슈베르트는 슬라브나 마쟈르의 요소를 풍부하게 채택하여 몇 개의 실내악곡을 작곡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르페지오네라는 새로운 악기에 흥미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나, 한편 이 기타에 첼로를 더한 듯한 성질의 음에 헝가리풍의 특징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혹되어 작곡하기도 했던 것이리라. 따라서 이 소나타에는 슬라브풍이나 마쟈르풍의 힘차고 개성적인 성격이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아르페지오네는 슈베르트 당대에 애호를 받다가 후에 사라진 악기이다.
기타와 유사한 형태, 음높이를 갖고 있으며 기타처럼 반음씩 나누어지는
지판을 가지고 있지만 첼로처럼 세워 활로 연주하는 악기였다.
현재에 와서는 많은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되나, 이 악기는, 지금의 첼로보다
피치가 높기 때문에, 아르페지오네를 위해 작곡된 작품을, 오늘날의 첼로로
연주할 경우에는 높은 음부의 빠른 패세지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또한 리듬에 변화를 준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Mischa Maisky (1948 ~ )
'첼로의 거장' 미샤 마이스키(55)는 장한나(20)를 세계적 음악가로 키운 스승이다. 그의 폭풍같은 격정은 자유분방한 연주 의상에도 잘 드러난다. 딱딱해 보이는 연미복을 거의 입지 않고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고 연주에 나선다. 정성스럽게 수염을 기르고 실크 블라우스 풍에 상당히 멋스럽고 우아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연주 스타일도 파격적이다. 과장에 가까울 정도로 박자와 멜로디의 즉흥적인 변화를 중시하는 탓에 '박자의 합리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섬세한 기교와 마음을 울리는 서정성을 빼놓고 마이스키의 연주를 설명할 수 없다. 또 의심할 여지없이 로스트로포비치, 요요마와 함께 세계 3대 첼리스트에 꼽힌다.
첼리스트 마이스키의 인생은 음악 만큼 드라마틱하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난 그는 유태계 집안 출신. 65년 소련 음악콩쿠르에서 6위로 입상한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발탁되어 지도를 받았다. 행운이 찾아온지 얼마 안되어 곧 시련이 왔다.
69년 누이가 이스라엘로 망명하는 바람에 14개월 간 강제수용소에 갇혔으며 2개월 간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 71년 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마이스키의 음악에도 서광이 비친다. 천재적 음악성을 인정받은 그는 20여 년 동안 빈필, 런던필하모닉 등 세계적 악단들의 '러브콜'을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