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신라의 황금과 왕릉

창포49 2012. 3. 1. 10:39

 

(신라의 황금과 왕릉)

 

▲ 대릉원의 신라 고분군, 신라 2~5세기경, 경북 경주 황남동

 

 

신라는 황금의 나라였다.

신라는 금이 풍부하고 가공기술이 뛰어나 일본 기록에는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9세기 중엽의 이슬람 기행문인 이븐 쿠르다지바의<도로와 왕국 총람>에서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교도들은 이 나라의 이런 이점 때문에 영구 정착하고있다. 그러나 그너머 동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사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신라의 황금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오고부터였다.

일제는 1918년 창녕 교동에서 9기의 고분을 2년에 걸쳐 발굴한 뒤 마차 20대와 화차(貨車) 2대에 유물을 실어 갔다.

그때 출토된 금동관, 금귀걸이들은 지금 도쿄국립박물관 오구라 기증실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경주에서는 별 성과가 없었다.

거대한 신라 고분 하나를 발굴했으나검 몇 자루만 출토되어 실망하고 검총(劍塚)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끝냈다.

그때 그들은 고분의 내부까지 파 내려간 것이 아니라 무덤이 완성된 뒤 제사 지내고 묻은 추가 부장품만 발굴했던 것이다.

그러다 1921년 9월.

경주 시내 노서동의 한 민가에서 증축공사를 하던 중 돌무지덧널무덤이 발견되어 긴급히 발굴에 들어갔다.

이 고분이 바로 금관총(金冠塚)이다.

 

금관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순금팔찌 12점 한 세트,금제 허리띠, 유리그릇, 굽은옥(曲玉)등 각종 금은 장식품과 더불어

도기가 1만 점이나 나왔다.

금제품의 총량은 7.5kg이었다.

신라의 황금이 세상에 드러나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금관총을 계기로 일제는 경주 시내에 있는 왕릉들에 155호분까지 일련번호를 붙였고

이후 발굴한 서봉총, 금령총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다.

 

해방 후 1971년 경주역사관광지구 종합개발계획을 세우고가장 규모가 큰 쌍분인 98호분을 발굴하기로 하면서

작은 155호분을 먼저 시험 발굴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기서 금관과 천마도가 출토되었다.

이것이 천마총이다.

98호분에서는 기대대로 금관과 5만 8천여 점의 유물이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황남대총이다.

신라는 왕릉의 나라, 황금의 나라였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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