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의 왕오천축국전)
▲ 혜초, 왕오 천축국전(부분), 통일신라 8세기. 42.0 x 358.0cm, 프랑스 국립도서관
혜초(慧超)의<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싶어 국립중앙박물관의 "실크로드와 둔황전"을 다시 가보았다.
1908년 프랑스의 펠리오 동양문화 탐사단이 둔황에서 발견한지 100여 년 만의 귀국전이다.
혜초의 생몰년은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8세기 전반, 20대 나이에 뱃길로 인도로 건너가 약 4년간 오늘날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등 다섯 천축 나라의 8대 영탑(靈塔)을 두루 순례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당나라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에도 나오지 않는 오지의 성지순례기라는 점에서 세계불교사와 기행문학의 한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받는 감동은 구법승(求法僧)으로서 혜초의 용맹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네편의 시로 읊은 인간적인 모습이다.
혜초는 달 밝은 밤이면 고향 서라벌이 더욱 그리웠다는데 어느 날 순례길에 티베트 승려를 만나서는 이렇게 시를 읊었다.
"그대는 티베트가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으로 가는 길이 멀어 탄식하노라 길은 험하고 눈 쌓인 산마루는 아득히 높고 골짜기엔 도적도 많은데 나는 새도 놀라는 가파른 절벽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는 건너기 힘들다네 평생에 울어본 기억이 없건만 오늘따라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네"
장안에 온 혜초는 서라벌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 밀교(密敎)의 제1조인 금강지(金剛智)와 제2조인 불공(不空)밑에서 경전의 편찬과 번역에 매진하였다. 불공은 유언에서 밀교를 이어갈 여섯 스님 중 두 번째로 혜초를 지목하였다. 그는 통일신라가 낳은 자랑스러운 당대의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이 육필본이 과연 혜초의 친필인가에 대해선 이론(異論)이 있지만 흐트러짐 없는 조용한 서체에는 스님의 높은 도덕과 따뜻한 인간미가 은은히 배어 있어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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