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뭉크

창포49 2012. 1. 19. 11:29

 

 

Edvard Munch 1863~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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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Der Schrei)

뭉크의 작품에서는 항시 사랑, 죽음, 불안 등이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정신 분열적 두려움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면서 또한 생활과 심리학적인 발전의 사건들과 깊은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이 작품은 뭉크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로서 원근법적인 방법을 구사한 것 중에 화면 구성을 대담하게 사선으로 구획하였으며,

강렬한 색채의 대비는 의외적이라기보다 상호 관계에 의한 다이나믹한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것은 절규하고 있는 상태로 느껴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연을 통해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연한 곡선과 강직한 직선과의 대비는 아르누보의 장식의 한 형태이며,

붉은 구름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일몰의 빛남과 동시에 공포의 화면을 나타낸다.

 

1893년 캔버스 유화 91 x 73.5 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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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Der Ton)

 

본래는 '여름 밤의 꿈'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 중 한 작품이다.

뭉크는 간혹 자연 속에 인물을 상징화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해 공명하는 한편,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 경험을 시각화하려 하였다.

여기서 표현된 여인은 체념한 여인으로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으로서의 삶을 갈망하는 상(像)인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달기둥이 자주 등장되어지는데

이것은 달에서 해로, 음陰에서 양陽으로 변화하여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동경과 고독, 불안에 차있는 여인이 소나무 앞에 우뚝 서있는 것이 멀리서 보트 놀이 하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수직적인 나무와 수평선의 바다 구성은 여인을 친근성 있으면서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준다.

독특한 기법에 의한 좀 색다른 개성있는 작품이다.

 

1893년 캔버스 유화 59.1 x 108 cm 보스턴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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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춤(Der Tanz ces Leben)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하여 예술적 생명성을 나타내려 노력하였는데

1894년 스톡홀름에서, 1895년 베를린에서 사랑 연작을 발표한 후 1902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생의 프라이즈' 연작으로 확대되어 발전한다.

이 작품 역시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그의 체험적 심성을 표현한 것으로 내부적 사고에서 생겨 난 것이다.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像)으로 보았는데, 꿈꾸는 여인, 삶을 갈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의 상으로

여기에서 표현되어진 여인들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매월 6월 23일마다 개최되는 하지제(夏至祭)의 무도회에서 느낀 것을 시도한 것으로써

인물의 대담한 배치, 색채의 강렬함, 해안선을 통해 나타난 강직함은 생명감이 충만하다.

 

1925년 캔버스 유화 143 x 208 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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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Der Neid)

1896년 석판 46.5 x 56.5 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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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의 소녀들(Die Madchen Auf Der Brucke) 1

 

강렬한 색채의 처리와 빛, 명암 관계를 조화있으면서도 대담하게 나타낸 것은 상당히 명쾌한 느낌을 주며,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선명한 색 감각을 발휘하고 있다.

원근법을 강조하였으며 비스듬히 놓여진 다리와 난간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녀는 단순화의 형태를 보여주며,

동감動感과 리듬을 화면에 도입시켜 구성하고 있다.

뭉크는 자연을 주관적 분위기에 의한 반영으로 보았으며, 낭만적인 자연 속의 인간의 무의미를 투영하려 했다.

곡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필세는 간명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판화로도 표현시키고 있는데, 구도는 거의 같으나 좌우가 완전히 반대로 된 동판화 '선창의 소녀'(1903년)와

같은 제명으로 된 목판화(1920년)가 있다.

뭉크는 판화를 유화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중요시하였다.

 

1900년 캔버스 유화 83.5 x 128.5 cm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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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의 소녀들 2

1901년 캔버스 유화 136 x 125.5 cm오슬로 국립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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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여자들(Die Frauen an Der Kuste)

 

이러한 주제는 뭉크가 일관해서 채택한 것 중의 하나로서 판화뿐만 아니라 유화로도 남겨지고 있다.

뭉크가 판화를 한 이유로는 개인 소유인 회화의 숙명이던 고립성을 극복하려는 뜻에서 연유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두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미래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며, 부푼 희망을 일깨우고 있는 상징적 내용이다.

목판화 제작을 많이 했는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바다 부분의 판목은 잘라내고 찍었다.

이외에도 어떤 경우는 다른 판목과 합성을 하거나 구도가 다른 목판을 붙여 찍은 시도적인 작품도 있다.

유화 작품은 목판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것으로써 부분적 표현이 복잡하다.

유화 작품 상단부의 노란색 형상은 월주月柱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性의 영원한 심볼로서 등장한다.

 

1938년경 캔버스 유화 80 x 83 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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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큰길(Die Strasse Des Dorfes)

 

이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인 1905년은 뭉크가 주로 독일에서 지낸 때로서,

그의 회화나 판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관성이 강한 그림으로 대상 표현이 특이하다.

색조의 대비 관계를 중요시 처리하면서 마을사람들이 무리를 형성시켜 움직이는 동세는 간결한 형태면서도

힘차고 전체적인 구성은 중후함마저 느끼게 한다.

눈이 내린 마을의 광장을 집회가 끝난 뒤인지, 아니면 축제일에 남녀가 기쁨을 나누고 있는 집단 행사인지,

전면에 무리지어 움직이는 오리와 대조적으로 강약의 하모니를 느끼게 한다.

풍경화에 있어서 중요한 근경, 중경, 원경에 대한 공간 처리를 오리, 인물, 건물 등을 통하여 공감있게 표현했다.

뭉크에게 있어 이러한 화풍은 보기 드문 것으로써 집단이 지니는 힘에 대한 압도력을 호소하기 위한 그림이 아닐런지.

 

1905년 캔버스 유화 100 x 105 cm 오슬로 뭉크 미슬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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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소녀(Tod und Madchen)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수한 세대와 장래의 세대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나타내고 있다.

벌거숭이의 천진한 소녀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해골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환희에 잠겨 있는 소녀는 죽음을 외면한 채 현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가장자리에는 정충이 그려져 있기도 하며, 태아가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사랑, 죽음이 동존 속에 같이 나타나며 남자, 여자 모두가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죽음을 느끼게 하는 테마는 후에 표현주의 회화에 간혹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원형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품으로, 유화 작품 외에도 동판화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이있다.

뭉크의 숙명관을 보는 듯하다.

 

1893년 캔버스 유화 128 x 86 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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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Die Angst)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1890년 도라 라우젠과의 관계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듯 기묘한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군상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正面性에 대하여 혹간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 친화성이라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뭉크의 근원적인 의문이나 불안이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창작토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 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과 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유화에서 뿐만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많이 남기고 있다.

 

1894년 캔버스 유화 93 X 72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소장

 

 

 

 

 

뭉크의 생애와 작품 세계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노르웨이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서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하여

내면세계를 시각화하였으며,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성 있는 작품 세계를 통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한 전환점을 제기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19세기 말 대두된 자연주의, 인상주의에 대한 역작용으로 상징주의나 아트 누보Art-Nouveau와 일련의 관계를 가지면서

발생되어진 주관주의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고갱, 앵소르, 고흐, 호들러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회화에 있어 극적 테마, 요약된 강한 형태, 강렬한 색채 등을 통하여 이탈된 회화는 평범한 대상 묘사가 아닌 자유 분망한 자기 표현을

나타낸 점이 주관주의 회화와 공통된다.

 

뭉크의 작품은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테마로 내면의 자기 표현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의 가정은 병과 죽음의 가정으로서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가정으로서 예고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인간 생명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상념에 늘 싸여 있었다.

뭉크는 죽음을 응시하는 자세는 내향적이었으며, <안으로의 응시>의 특징은 줄곧 죽음을 향한 불안에 근거를 두고 존재되어졌다.

이런 속에서 관찰된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주제로 하여 <생명 프리이즈The Frieze of Life> 시리즈를 위시한 많은 작품을 만들 었다.

이외의 <절규>를 비롯하여 자화상, 입맞춤, 마돈나, 인간들, 초상화 등의 유화, 판화 작품들을 남겼다.

근년에 이르러 뭉크에 대한 예술적 평가는 다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으로 부터 많은 공감을 강하게 갖게 되는데

이는 생명과 죽음,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과 불안 등이 뭉크의 예술과 공통되는 청년기 특유의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뭉크 예술의 특징적인 것은 모티브의 변화는 약간 있기는 하나, 양식의 변천은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ii)

뭉크의 가정은 19세기 노르웨이에서는 상류 계급에 속하는 존경받는 전통적 전형이었다.

아버지 크리스찬 뭉크는 군의관이었고, 백부인 페타 안드레 뭉크는 유명한 역사가로 집안의 자랑이었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남 노르웨이의 로이뎅 근처 엔겔호이크에서 태어났으며,

뭉크가 태어나자 일가는 현재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로 이사를 했다.

뭉크는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서 그가 다섯 살인 1868년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은 불행을 맞게 된다.

 

국교 신도인 아버지는 하류층을 상대로 한 병원을 개업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성격의 변화를 일으킨 듯 거칠면서도 편벽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어머니 대신 가정을 맡아 돌봐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 나이 14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이런 환경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내향적 성격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소년시절의 경험은 일생 지워지지 않은 속에 비극적인 제재를 중심으로 반복하여 그렸다.

판화로 제작한 <병든 아이>는 누이 소피에의 모습으로 그녀에 대한 추억이 깊이 잠재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사가 되기 위한 과정의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지망하여 오슬로 국립 공예학교에 입학한 후 조각가 미테르 트웅과 화가 크리스티나 크록에게 사사하게 된다.

오슬로에서 그는 마네의 뛰어난 기술과 색채를 노르웨이에 전하였다고 하는 크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과 동시,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고독과 우수만이 내재된 속에 죽음만을 생각하던 그는 미술을 통해 생의 전환기를 갖게 되었으며,

1893년 그룹 전람회에 참가하기로 하는데 중요한 진보의 계기가 된 것은 오슬로의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 파와의 교류로 인한

시대 의식을 민감하게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이다.

보헤미안 파에 대하여<그들의 무신론, 그러한 두려움을 모르는 태도는 노르웨이 시민의 녹슨 것 같은 혼에 불안의 그림자를 안겨 주었다.

 

1880년대 초에 뮌헨에 있던 화가 중 가장 우수하고 의욕적인 젊은 화가들은 파리에 이동하고 있다가 그들도 귀국하여 왔다.

그들은 인상주의나 아나키즘 등 새로운 사상으로 차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정부주의적일 만큼 철저한 개인주의자였으며, 문단에서는 입센Henrik Ibsen, 비요른손Bjornstjerne Bjornson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에밀 졸라(Emile Zola)를 존경하였으며, 졸라의 자연주의에 심취한 크로그가 이끄는 보헤미안과의 접촉을 통해

정신면에서의 진보와 함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89년 프리츠 다우로의 추천으로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하게 되는데 마네의 안상파에서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되며

피사로, 고호, 고갱, 로트렉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는 <카를 요한 거리의 군악대>, <병든 아이>, <사춘기> 등의 걸작을 남기고 있다.

1889부터 1892년까지 파리에 머물게 된 뭉크는 처음에는 아카데믹한 초상화가 레옹 보나 Leon Bonat의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비례, 구도에 대한 기초적인 소묘 기법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고

뭉크의 예민한 감수성은 후에 새로운 예술에 접하면서 인상파, 신인상파로부터 공감을 받은 후

나비파, 상징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체험을 통한 후에 주관주의적인 작품 해석으로 승화 발전하게 된다.

 

188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며, 이해 생 클루로 이사를 하고 이 시기에 <생명 프리이즈>연작을 구상케 된다.

생 클루에 머물면서 쓴 그의 일기 중에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게질을 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와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1892년 베를린에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단체와의 교류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되며

그 해 오슬로로 돌아와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반자연주의적인 내용의 작품으로 스캔들을 일으킨다.

인상파나 마네의 작품에 대한 문제성에 대해 귀결도 못 보던 당시의 화단은 주관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이 너무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물의로 인해 개인전은 중지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유명해졌으며,

그의 예술을 이해하여 주는 예술가, 시인, 평론가, 콜렉터 등의 주위에서 지지와 호응을 안겨 주었다.

 

1893년에는 드레스덴, 뮌헨, 베를린, 94년에는 함부르크, 드레스덴, 프랑크 푸르트, 코펜하겐 등 북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전람회를

개최하는 한편 개성적이면서도, 확고한 예술 세계를 위해 정진했다.

1895년은 베블린 시대의 문인들과의 접촉으로 그들의 초상화를 판화, 유화로 그렸는데

특히 이 시기는 뭉크가 판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동판, 드라이포인트를 시도한 것은 1894년이며, 채색 석판화, 목판화를 시작한 것은 1896년으로서

<병든 아이>, <죽음과 소녀>, <마돈나>, <절규>, <입맞춤>등의 무수한 판화 버전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판화를 회화만큼 중요시 다루었던 그는,

판화의 창의적 시도와 기법 혁신을 유화와의 동질로서 같은 모티브에 대한 재확인 식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에 걸쳐 파리에 있는 동안은 삽화, 무대 장치 등에도 손을 대었으며,

앙데팡당, 아르누보전 참가, 개인전 등을 통해 의욕적인 자세를 보였다.

1898년부터 1907년까지는 독일,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건강을 위한 요양 생활을 하는 한편,

새로운 작업을 위해 매진하였다.

베를린 분리파 전람회에 <생명 프리이즈> 22점을 출품하고 파리 앙데팡당전에 참가한 것도 이 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뒤에는 알콜 중독과 노이로제, 정서적 강박 관념등으로 인해 괴로워 하는 개인적인 모습이 있었는데

그는 이런 문제들로 인해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퇴원을 한 후에는 자연에 대한 친숙함을 표현키 위해 풍경화를 많이 그리기도 했다.

 

1911년 오슬로 대학 페스티벌 홀의 벽화 콩쿠르에 당선되면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된다.

1912년에는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 대전람회에 세잔, 고호, 고갱과 동시에 전시를 갖게 되는 영광을 안으면서

뭉크 예술에 대한 평가는 점점 높아지게 된다.

같은 해 처음으로 미국에서 전시를 갖게 되는데 뉴욕에서 개최된 현대 스칸디나비아전에 이어 1913년 유욕 아몰리 쇼와

1922년 취리히 미술관, 1927년 베를린 국립 미술관 등에서 각각 대회고전이 열리게 되는 등 국제적으로 위치를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1937년에는 칸딘스키 등과 함께 퇴폐예술이란 낙인을 찍히고 나치스에게 작품을 압수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한다.

1944년 1월 23일 나이 80세가 되는 해 사망했다.

 

 

iii)

 

뭉크는 사랑과 죽음, 불안, 자화상, 초상화, 판화 등을 주제로 한 연작을 남기고 있다.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생명 프리이즈>는 인상파 작가들이 다루려는 직관적 감각성과 달리 작가 자신의 의식에 배어있는

내재적 상태를 중요시했으며 인간 내부적인 심성을 나타내려 했다.

1894년 스톡홀름에서, 1895년 베를린에서 전시된 것이 <사랑> 연작으로서 이 22점의 프리이즈는

사랑의 싹툼, 사랑의 만개, 애락哀落, 생의 불안, 죽음으로 구성된 악장으로 된 연작으로서

이 거대한 테마는 그의 체험적 사고에서 발생된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작품에서의 분위기는 1880년대의 갈등으로부터 생겼으며,

당시 주류를 이루던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겠는데

이 연작이 그중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또 뭉크의 작품에서는 사랑, 죽음, 불안 등과 언제나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정신 분열에 의한 두려움의 개인적인 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생활 자체를 존재의 사실성으로 복귀시키려는 자아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뭉크의 자화상 시리즈는 삶과 죽음과 싸우는 속에 죽음을 관념으로 확대하여 받아들이려는 자세로서

생을 향한 불안의 극복은 전생애를 통한 자기 완성에의 도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뭉크는 생애를 통해 가장 위대한 초상 화가였으며 항시 그리는 대상은 그 자신이었고 전 인생을 통해 변천되어진 자아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한 마디로 객관적인 사실성을 초월하여 자신의 내적 혼과 정신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연계적인 그의 자화상은 뭉크 자신의 내면성의 고백, 죽음에 대한 갈등, 대결, 불안 등에 대한 상징으로서

죽음을 수용하려는 모습이 기조가 되고 있다.

 

복수 예술로서 다원성을 지닌 판화는 뭉크에 있어 회화에 필적하는 것으로 중요시 하였다.

뭉크가 처음으로 판화를 한 것은 1894년 8장의 에칭Etching과 1장의 목판화를 제작한 것부터인데

1896년 파리 시대는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유화의 중요한 작품과 초상화가 판화를 위한 출발점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반대로 유화로 옮겨진 것도 있다.

그는 수많은 시도를 통해 회화 못지 않게 판화 작품을 제작하였고,

판화 기법상으로도 다양한 혁신을 주고 있다. 판종을 여러가지로 병용하거나, 판목을 분리해서 합성하기도 했으며

부식판을 통해 릴리프적 효과를 의식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뭉크의 현대에 와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단순히 복제품이라고 하는 사고에서 독립된 미술의 예술품으로 발전시켰다.

 

뭉크의 회화는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한 인간의 내면 세계를 시각화하였으며,

미술사에 한 전환점을 제기하였고 주관주의적 경향을 특징으로 한 속에 대상을 묘사하는 회화로부터 벗어나

자기 표현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고 완성시켰다.

 

<출처: Youka's Gallery>

 

 

Death in the Sickroom 1895

 


The Dance of Life 1899-00

 

 

 

The Dead Mother 1899-00

 



Evening on Karl Johan 1892

 

 

 

Night in St. Cloud

 

 

 

 

Girl Kindling a Stove.1883 < 난로에 불을 지피는 소녀>

 

 

 

 

 

 

Aunt Karen in the Rocking Chair.1883

 

 

Sister Inger, 1884

 

 

 

 

 

 

The Sick Child, 1885-1886

 

 

 

 

 

 

Summer Night (Inger on the Shore) 1889

 

 

 

 

 

 

The Voice 1893

 

 

 

 

 

Ashes1894

 

 

 

The Day After 1894-1895

 

 

 

 

Girl Washing

 

 

 

 

 

 

Melancholy, Laura

 

 

 

 

Sister Inger, 1892

 

 

 

 

Melancholy

뭉크는 일평생 가정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여인들과 사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 여인과 사는 남자는 무엇인가 자신 속에 죽어가고 있다는 위협적인 생각 때문이었다고..

니체, 스트린느 베르히, 보들레르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여인에 대한 증오,

여인이란 성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내면이 이렇게 표현되었으며 그는 80 평생을 결국 외롭게 살았다.

 

 

 

 

 

Vampir 1893

 

 

<뭉크는 오랫동안 여러 여자들과 사귀었으나 누구와도 오랜 관계를 갖지 못하였다.

어느 여인에게서도 그는 감사한 생각이나 즐거운 회상의 대상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자들이 부드럽게 대할수록 공포감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다. ..

그는 여인들을 영원히 남자를 잡아먹는 것으로 인해 살고 있는 흡혈귀로 생각하고 있는것이다..>

그의 내면은 한없이 불행해 보인다. 그의 그러한 욕구는 그의 삶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신경병적이고 내향적인 한 예술가의 전반적인 삶속에..

 

 

 

 

 

 

The Kiss, 1897

두 남녀가 꼭 부등켜 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도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

그들은 불안과 공포와 고뇌를 끌어안고 있는 군상의 일부처럼 보여진다.

그래서 화합이 아닌 파괴를 위한 공모자처럼 서로 얼켜져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에로스의 가장 깊숙하고 가증스러운 어두운 면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는 혹자의 표현은 참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Woman in Blue (Frau Barth), 1921

 

 

푸른 옷의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꿋꿋히 서 있지만, 여인 주변에 묽어진 푸른 톤은 그녀를 흔들리게 한다.

두 눈동자가 그려졌음에도 시선의 방향은 예측하기 어렵다.

마치 바라보는 것이 현상이 아닌 듯이.. 그 아래 붉은 터치도 그렇게..미숙한 붓질처럼 지나가다 멈추어 서 있다.

 

 

 

 

 

 

Girl on the Beach.1896.Aquatint with scraper and drypoint

 

 

 

 

 

 

 

 

 

 

 


Self-Portrait with Burning Cigarette 1895





Madonna 1894-95






Puberty 1895







The Sick Child, 1885-1886

 





Self Portrait: Between Clock and Bed 194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