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송당 김지의 동자견려도)
▲ 김지, 동자견려도 조선 16세기, 111.0 x 46.0cm 삼성미술관 리움
혹자는 조선 선조를 임진왜란을 겪은 무능한 임금으로 평하지만 그것은 재위 42년 중 마지막 8년간에 일어났던 불운이었을 뿐 후대인들은 오히려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칭송했다.
목릉은 선조의 능이다.실제로 목릉조에는 울곡 이이,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권율 장군, 이순신 장군 등이 있었다.화가로는 양송당(養松堂) 김지(金至 1524~1593), 글씨에서 석봉 한호, 문장에서 간이당 최립이 당대의 삼절(三絶)로 칭송되었다.양송당은 과연 당대의 대가로 매너리즘에 빠진 기존의 서정적 소상팔경도 풍의 산수화를 벗어던지고 절파 화풍이라는 신풍을 일으켰다.
명나라 절강성 화가들이 일으킨 이 화풍은 묵법(墨法)을 많이 사용하여 먹의 쓰임이 강렬하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인간 중심의 산수화가 특징이다.양송당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받아 들였다.
그의 대표작인 보물 제783호<동자견려도 童子牽驢圖>를 보면 나귀와 동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그림의 주제로 삼고 있다.본래 네발 달린 짐승은 본능적으로 땅이 아닌 곳은 밟지 않는다.그래서 나귀는 한사코 나무다리를 건너지 않으려고 뒷걸음치고 동자는 어서 가자며 잡아끌고 있다.
이 상황의 표현이 아주 생생하여 그림 속엔 사실감과 인간미가 넘친다.특히 양송당은 작품상에 낙관을 분명히 나타냈다.
숙종 때 남태응은<청죽화사 聽竹畵史>를 쓰면서 기록이 아니라 실작품으로 대가임을 보여주는 조선시대 첫 화가는 양송당이라 할 정도였다.양송당은 연안김씨 명문 출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김안로(金安老)의 넷째 아들이다.
그러나 14살 되던 1537년,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는 바람에 출셋길이 막혀버렸다.
부친이 사약을 받던 날은 그가 장가가는 날이었다.
다행히 이 집안은 그림의 혈통이 있어 아버지는<용천담적기 龍泉淡寂記>라는 저서에서 국초(國初)의 그림에 대해 논한 바 있고 큰 형님도 그림에 능했다.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던 양송당은 그림의 피를 받아 일생을 살았는데 오히려 한국 미술사의 대가로 이름을 남겼고 손자 또한 화가가 되어연안김씨는 그림의 명문가로 남게 되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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