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지는 꽃을 우얄끼고 오경화

창포49 2018. 4. 27. 11:59




지는 꽃을 우얄끼고 오경화

 

술을 앞에 두고 보니 백발이 참 가련한데       對酒還憐白髮多(대주환련백발다)

세월은 물과 같아 멈추는 법이 없네               年光如水不停波(년광여수부정파)

봄이 하마 다 간다고 산새들도 봄이 아파      山鳥傷春春已暮(산조상춘춘이모)

제 아무리 울어대 본들 지는 꽃을 우얄끼고  百般啼奈落花何(백반제내낙화하)


원제: 對酒有感(대주유감): 술을 마시다가 느낌이 있어.

 

이 시를 지은 오경화(吳擎華;?~?)는 한시로는 딱 한 수의 시 만을 이 세상에 남겨놓은 시인이다. 위의 시가 바로 그 한 수다. 그가 누군지도 잘 모른다. 다만 조선후기 중인(中人)들의 시선집인 ‘풍요삼선(風謠三選)’에 수록된 이 시의 작자 소개를 통해 자는 자형(子馨), 호는 경수(瓊叟), 본관이 낙안(樂安)이란 것을 겨우 알 수가 있을 뿐이다. 중인들의 시선집에 실린 것을 보면, 그도 중인으로서의 신분적 비애를 안고 한 많은 한 세상을 살아갔을 게다.


그래도 오경화는 남다른 감성을 지닌 도저한 풍류시인이었다. 작품 속의 화자는 지금 술을 마시면서 그 검던 머리가 어느 새 파뿌리로 변해버린 자신의 백발을 한탄하고 있다. 한탄하고 있는 그 사이에도 세월은 강물처럼 요동을 치며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꽃 피는 봄도 이제 곧 와장창 끝장이 난다. 땅이라도 치면서 흑흑 흐느끼며 울고 싶은데, 그의 슬픔을 산새들이 대신해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울어댄다. 하지만 제 아무리 땅을 치며 울어대 본들 떨어지는 꽃을 어느 누가 말릴 수 있을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술이나 한잔! 

   

오경화는 몇 수의 시조도 남겼다. “곡구롱 우는 소리에 낮잠 깨어 일어보니/ 작은 아들 글을 읽고 며늘아기 베 짜는데 어린 손자는 꽃놀이한다/ 마초아[때마침] 지어미 술 거르며 맛보라고 하더라”. 그가 지은 시조 가운데 하나다. ‘곡구롱’은 꾀꼬리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바야흐로 화자는 팔자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 곡구롱 곡구롱 꾀꼬리의 감미로운 노래 소리에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상태다. 깨어나서 보니, 작은 아들은 책상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공자왈 맹자왈 책을 읽고 있고, 며늘아기는 베틀 위에 앉아 찰칵찰칵 베를 짜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손자 녀석은 지금 꽃놀이에 얼이 빠져 있다. 집안 식구들이 다들 알아서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흐뭇하고 대견스럽다. 게다가 때마침 아내가 새로 담은 술을 거르고 있다가, 맛 좀 보시라며 한 사발 막걸리를 내어놓는다.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봐도 이보다 더 행복한 삶이 좀처럼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파란만장의 정치적 부침을 겪으면서 수천 수의 시를 남긴 대시인도 좋기는 하다. 하지만 천지간 산수 속에 고이 엎드려 오순도순 정겹게 살아가면서, 단 한 수의 한시와 몇 수의 시조를 후세에 남겨놓은 오경화의 삶도 참 부럽다. 양자택일을 해보라고 하면, 그의 손을 번쩍! 들어주고 싶다.


                글: 이종문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