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빨강머리 앤이 동경했던 그녀, 사랑때문에 목숨 잃은 비련의 여인

창포49 2016. 3. 5. 18:47

[Why] 빨강머리 앤이 동경했던 그녀, 사랑때문에 목숨 잃은 비련의 여인

            

[곽아람 기자의 그림 앞에 서면]

미술관에 갈 때면 묘하게 시선을 끄는 그림을 한 점쯤 만난다. 작년 말 런던 출장 중 테이트 브리튼에 들렀을 땐 그림 속 여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넋이 나간 듯하면서도 고혹적인 눈빛. 살짝 벌어진 입술은 붉고, 풍성한 금발이 흰 드레스 위로 애처롭게 흘러내린다. 여인은 강기슭에 묶인 배의 사슬을 풀고 이제 막 홀로 항해를 시작하려는 중이다. 고전주의를 추구하면서도 라파엘 전파(前派)의 영향을 많이 받은 화가 존 워터하우스(1849~1917)의 1888년 작 '샬롯의 아가씨'<사진>다.



샬롯의 아가씨 / 테이트 브리튼 소장


'라파엘 전파'란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 이들은 당시 왕립미술원이 선호하던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이상화된 미술을 비판했다. 대신 라파엘로 이전처럼 자연에서 겸허하게 배우는 예술을 표방하자고 주장했다.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문학 작품의 한 장면을 즐겨 주제로 삼았는데, 워터하우스는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이 쓴 동명의 시(詩) 속 장면을 화폭에 옮겼다.


시 '샬롯의 아가씨'는 저주에 걸려 샬롯의 탑에 유폐된 여인의 이야기다. 샬롯은 아서왕의 성(城)이 있는 카멜롯 인근 강에 있는 섬. 여인은 거울에 비친 상(像)을 통해서만 바깥 세상을 보도록 허락받았고 종일 거울 속 풍경을 마법의 직물에 짜 넣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대개 그러하듯 여인에게도 규율을 어기고 마는 날이 온다. 잘생긴 기사 랜슬롯이 거울에 비치자 여인은 창가로 달려가 랜슬롯의 얼굴을 직접 보고야 만다. 거울은 깨어지고 여인은 저주에 따른 벌을 받게 된다.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랜슬롯이 있는 카멜롯을 향해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숨지는 것이다.


테니슨은 노래했다.


 "흐릿하게 펼쳐진 강도 내려다보고/ 무아지경에 빠진 어떤 용감한 예지자처럼/ 그 자신의 모든 불행을 바라보면서―/ 유리처럼 무표정한 낯빛으로/ 그녀는 카멜롯을 보았다네/ 그리고 날이 저물 때/ 그녀는 사슬을 풀고 누워버렸네/ 드넓은 물줄기는 그녀를 멀리 실어갔네/ 샬롯의 아가씨를."


테니슨은 유사한 이야기를 아서왕 전설을 소재로 한 '국왕 목가(國王牧歌)'에서도 선보였다.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앤이 이 시에 나오는 '백합 아가씨' 일레인을 흉내 내 조각배에 누워 호수에서 떠내려가다가 배에 물이 새 익사할 뻔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국왕목가에서 귀족의 딸 일레인은 랜슬롯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슬픔으로 숨을 거두는데, 가족들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배에 실어 카멜롯으로 보낸다.


'샬롯의 아가씨'와 '백합 아가씨'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다. 그러나 이들의 낭만성을 동경한 '빨강머리 앤'은 호수 다리 기둥에 매달려 있던 자신을 구해준 남자와 수년 후 결혼한다. 앤의 '구원의 기사'는 치명적 매력의 남자 랜슬롯과는 거리가 멀었다. 빨강머리를 놀렸다는 이유로 앤이 원수처럼 여기던 같은 반 남학생 길버트다. 역시 인연은 이상(理想)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