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스크랩] 우리 문화유산의 심층 탐구 21 ( 경주 황룡사지 )

창포49 2017. 1. 16. 01:03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에 이곳 반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도록 하였는데 황룡의 출현으로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한 호국 사찰로서, 17년 만에 1차 공사를 끝내고 주위의 담장도 완성하였으며, 진흥왕 35년(574년)에 본존불인 금동장륙상이 완성되고, 선덕여왕 12년(643년)에는 자장율사의 권유에 따라 9층 목탑이 착공되어 2년 후에 완성하여, 4대의 임금에 걸쳐 93년이란 세월이 지나 완공되었답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건물과 탑, 불상의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뿐이지만,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절터의 면적만 약 25,000평에 이르는 신라에서 제일 큰 사찰 이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3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 목탑과 장륙존상 이였다는 것으로도 황룡사가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 역대 왕 연대표

왕위 왕 명 성씨 재위 시기    왕릉 위치           특기 사항

24 진 흥 왕 김 37 540 ~ 576 서악동 대가야 평정, 화랑제도 창시

25 진 지 왕 김 4 576 ~ 579 서악동 중국 陳과 수교

26 진 평 왕 김 54 579 ~ 632 보문동 隨, 唐과 수교, 불교 진흥

27 선덕여왕 김 16 632 ~ 647 보문동 낭산 분황사 창건, 첨성대 축조

28 진덕여왕 김 6 647 ~ 654 현곡면 나원리 당나라 식 服制 개편

29 무 열 왕 김 8 654 ~ 661 서악동 백제 멸망시킴 (김유신)

30 문 무 왕 김 21 661 ~ 681 봉길리 대왕암 통일(나당 연합), 안압지 축조

31 신 문 왕 김 12 681 ~ 692 배반동 국학 창설, 서원소경 설치

32 효 소 왕 김 11 692 ~ 702 구정동 醫學博士 제도 도입

33 성 덕 왕 김 36 702 ~ 737 구정동 通文博士 설치(외교문서전담)

34 효 성 왕 김 6 737 ~ 742 골분을 동해에  

35 경 덕 왕 김 24 742 ~ 765 내남면 부지리 석굴암, 불국사 창건

36 혜 공 왕 김 16 765 ~ 780   왕당파와 귀족간의 갈등 계속

37 선 덕 왕 김 6 780 ~ 785 분골을 동해에  

38 원 성 왕 김 14 785 ~ 798 외동읍 괘릉리 讀書三品科 (인재등용)

39 소 성 왕 김 3 798 ~ 800    

40 애 장 왕 김 10 800 ~ 809   해인사 창건

41 헌 덕 왕 김 18 809 ~ 826 윗 동천 대동강에 長城 3백리 축조

42 흥 덕 왕 김 11 826 ~ 836 안강읍 육통리 淸海鎭 설치 (張保皐), 차나무

43 희 강 왕 김 3 836 ~ 838 내남면 망성리  

44 민 애 왕 김 2 838 ~ 839 내남면 망성리  

45 신 무 왕 김 1 839 ~ 839 대도동 장보고 지원으로 왕위, 병사

46 문 성 왕 김 19 839 ~ 857 서악동 남해일대 制海權 장악(장보고)

47 헌 안 왕 김 5 857 ~ 861 서악동 제방 쌓고 농사 장려

48 경 문 왕 김 15 861 ~ 875   皇龍寺塔 수축






 황룔사 및 주변 상상도

황룔사지의 현재의 모습


가람 배치는 남쪽에서부터 차례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중심선상에 자리 잡고, 중금당 좌, 우에 동, 서 금당이 위치한 1탑 3금당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보통 산지 가람은 산을 배경으로 하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 평지 가람인 황룡사는 가람 배치를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점 칸을 늘여 감으로써, 절 안에 들어 갈수록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여 평지 가람의 단순함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후일 신라의 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친히 불사에 참례하였고, 외국의 사신들도 자주 이 절에 와서 예배하였다고 하나, 불행하게도 고려 고종25년(1238년)에 몽고군의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답니다.

황룡사의 종루에는 경덕왕 13년(754년)에 구리 약 50만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 또한 몽고군 침입 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574년경에 만들어진 황룡사의 금동장륙삼존상은 신라 최대의 불상임과 동시에 걸작으로, 본존불의 무게가 약 3만 5천근, 두 보살의 무게가 약 1만 2천근 이라하며, 지금 금당 터 중앙에 남아있는 3개의 석조 대석이 바로 이 금동장륙삼존상을 안치하였던 대좌이며, 자연석을 생긴 그대로 윗면을 평평하게 고르고, 장륙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을 파서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발굴조사 시 강당 터에서 발견된 높이 182cm에 이르는 치미(鴟尾 ; 전각이나 문루 등 우리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끝머리에 얹는 기와)는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황룡사 터에서 발굴된 치미

 금동장륙삼존상을 안치했던 석조 대좌

 

황룡사 9층 목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목탑 양식이며, 정면과 측면 각각 7칸, 높이 80여 미터의 웅장한 규모로 세워진 뒤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나, 고려 고종 25년 몽고군의 침공 시 소실되었답니다.

현재 탑 자리에는 외두리기둥 초석 28개, 안두리기둥 초석 36개와 함께 가운데 큰 기둥을 받치던 심초석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터

9층 목탑 찰주 심 초석






심 초석의 사리구멍 안에서는 사리를 모셨던 사리 갖춤이 발견되었는데, 이 사리 갖춤의 외함에는 탑을 조성한 내력이 적혀 있어 찰주(刹柱 ; 탑의 중심기둥)본기(本記)라 부르며, 1964년 도굴 되었던 것을 1966년 되찾은 것으로, 금 동판 4개를 경첩으로 연결시켜 상자를 만들었고, 한 변은 문고리를 달았으며 이 문의 앞, 뒷면에는 부처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과 신상이 각각 2구 씩 새겨져 있으며, 나머지 세면에는 9층 목탑을 만든 경위와 탑이 기울어 경문왕 때인 871년 탑을 고친 내역을 새겼습니다.

탑을 세운 경위는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삼한의 통일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세우자고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이간 용수를 감독으로 하고 백제 장인 아비지를 대장으로 삼아 높이 225자(약 80m)의 목탑을 건립하였답니다.




  찰주 본기 발굴 상태

찰주 본기 복원 모습


여기서 9층탑의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중국),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 (중국 강소성 동쪽 섬),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거란), 8층은 여적(여진), 9층은 예맥을 복속시키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SE J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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