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을 무럭 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강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 남아서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예술가에겐
깊은 외로움이 없어선 안 된다."라고 한
가을에 생각나는 시인 릴케,
가을날 느끼는 서정으로 신의 섭리와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을 가슴 속 깊이
자리매김케 하는 위대한 시, 가을날.
인간 근원적 고독에 대한 성찰을
가을의 풍성함과 쓸쓸함의 극단적 대비로
경건한 어조와 기도로 절대자에게
자비를 기원하는 이 시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내 젊은 시절의 편린인 릴케의 시를 상기하면
엷은 미소가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학창시절
릴케의 "잠 못 이루는 이 밤을 위하여"란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한껏 무게 잡고
친구 만나러 가는 주말 버스 안에서 옆에 앉은
승객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기억이 있다
표지에 릴케의 모습이 한 면을 가득 채웠지만,
시집 제목이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을
받은 듯하다
음정 회원 여러분,
이 가을에 가을날이란 릴케의 시와
어디에서든 절정으로 치달을 가을의
완숙함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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