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스크랩] 나혜석의 여자도 사람이외다 1

창포49 2015. 8. 6. 13:05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는 나혜석거리가 있다. 올해로 탄생 113 주년이 되는 나혜석은 여류화가이며 작가였고, 여권운동의 선구자였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러 이혼을 당한, 화냥끼 많고 몰염치한 여자라는 이미지로만 부각되었던 나혜석이 불과 십여년의 세월동안 여성 선각자의 이미지로 재조명 되고 있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 유학을 가 도쿄여자미술학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18 년 귀국하여 교사로 근무하면서 1919 년 3.1 운동에 적극 관여했다는 죄명으로 5 개월간 옥고를 치뤘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매년 입상을 했고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참여 등을 주장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1999 년 '제 1 회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이 열린 후 2000 년 2 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나혜석이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면서 그동안 가려졌던 그녀의 진면목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한 재평가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하는 중이며, 해마다 수원미술협회 주최로 '나혜석 미술대전'이 열리고 있다. 이에 수원시에서는 나혜석이 태어났던 팔달구 인계동 효원공원에서부터 서쪽으로 600 미터의 거리를 '나혜석거리'로 조성했다.
    나혜석 나혜석 (1896. 4. 28 - 1948. 12. 10)은 사법관을 거쳐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로 재직했던 나기정의 5 남매 중 네째로 수원에서 태어났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하기 전에는 이름이 아지, 입학 후에는 명순이었으나, 졸업 무렵에는 혜석으로 바꾸었으며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 경석의 권유로 1913 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갔고 최승구, 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한다.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같이 좀 되어 봐야만 할 것이 아니오?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만 할 것이 아니오? 미국 여자는 이성(理性)과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불국(佛國) 여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일보를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悲運)은 너무 참혹 하오 그래." - 1917. 학지광 4 월호
    이화원 1918 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만세사건에 연루돼 투옥되었던 일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그 이후 나혜석은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고자 일본 유학생 이었던 교토제국대학을 다니던 오빠 친구 김우영의 6 년간의 구애 - 김우영이 나혜석에게 구애했을 당시 김우영은 나혜석 보다 10 살 연상이 었으며 아내와 사별한 뒤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 를 받아들이면서 김우영에게 다음과 같은 결혼조건을 내세운다. 첫째 :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사랑해 주시오. 둘째 :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자화상 김우영은 이 세가지 조건에 흔쾌히 찬성했고 1920 년 4 월 10 일 서울 정동 제일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후, 나혜석이 원하는 대로 혜석의 첫사랑이 누워있는 곳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그녀의 첫사랑 최승구 묘지에 비석까지 세워주며 아내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나부 (1928 년) 최승구는, 나혜석이 동경 유학 때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최승구에게는 고향에 이미 결혼한 아내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얼마 후 최승구는 젊은 나이에 그만 요절하고 만다. 나혜석은 결혼하기 전이나 후에도 최승구와의 사이를 한 번도 부끄럽게 여겨본 적이 없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규수들이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로 혼인을 하는 게 당연하다 여겨지던 시절이었지만 자신의 상대를 자유 의지로 선택했던 나혜석은, 어쩜 자유연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싶었던지도 모르겠다.
    무희 (1928 년) 그녀는 늘 유교적 남성권위주의가 만연해 있는 조선 사회에 변화의 물꼬를 트고자 했다. 여자도 사람으로 인정 받으며 한 인간으로 존중받는 세상, 그것이 바로 나헤석의 꿈이자 소망이었던 것이다.
      수원 서호 나혜석은 결혼을 하고난 후 작품활동에 더욱 매진한다. 그러나 결혼한지 5 개월만에 임신을 하게 되고 임신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 낯선 모습에 무척 두렵고 당황해 한다. 모된 감상기 / 나혜석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히 탕 하는 것 같이 들리었다. 어머님 나 죽겠소, 여보 그대 나 살려주오, 내 심히 애걸하니 옆에 팔짱끼고 섰던 부군 "참으시오" 하는 말에 "이놈아 듣기 싫다" 내 악 쓰고 통곡하니 이 내 몸 어이타가 이다지 되었던고." - 1921년 4월 28일. 25세. 나혜석은 아이 낳는 고통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제껏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어머니가 되는 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곧 젖먹이 키우는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잠을 못자는 고통이 가장 컸다. "이러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기(幾) 개월간 계속 되더니 심신의 피곤은 인제 극도에 달하여 정신은 광증이 발하고 몸에는 종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 - 모된 감상기 / 나혜석 벽도 없이 문도 없이 동하여 광야 되고 그 안에 있는 물건 쌩쌩 돌아가는 어쩌면 있는 듯 어쩌면 없는 듯 갖은 빛 찬란하게 그리도 곱던 색에 매몰히 씌워주는 검은 장막 가리우니 이내 작은 몸 공중에 떠 있는 듯 구석에 끼여 있는 듯 침상 아래 눌려 있는 듯 오그려졌다 펴졌다 땀흘렸다 으스스 추웠다 - '동명' (1923. 1. 14)
      수원 화성문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예요.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오냐, 사람이다.' - 소설 <경희>중에서
      농촌풍경 (1922 년) 1921 년 3 월에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나혜석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인형의 가(家) / 나혜석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 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나 이제 깨도다 ... - 매일신보 (1921. 4. 3)
      마차 냇물 / 나혜석 - 화홍문루에서 퍼렇던 물 짜지고 맑던 물 퍼래지고 흐리던 물 맑아지고 호(湖)되고 강 되고 해(海) 되면 저렇게 흘러서 냇물! 냇물! 외롭게 흐르는 냇물 언제든지 쉬임없이 싫든지 좋든지 춥든지 더웁든지 밤부터 새벽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람 불면 무늬 지어 눈 오면 녹여주고 비 오면 방울방울 달밤엔 백색같이 캄캄한 밤 흑색같이 맑은 날은 반짝반짝 흐린 날은 푸르죽죽 쫄쫄 흐르는 저 냇물 - '폐허' 2호 (1921. 4) 그해 9 월 일본 외무성 안동현(현재 단둥)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사한다.
    만주 봉천 풍경 (1924 년) 1927년 나혜석은 외교관인 남편 김우영과 2 년간 구미여행을 떠나게 된다. 나혜석의 구미여행은 그녀 자신은 물론 미술과 문학에 있어 작품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나혜석이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신문, 잡지를 통해 밝힌 바에 의하면, 구미여행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나혜석의 미술 세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나혜석의 구미여행의 의미는 조선이 추구해야 할 여성의 새로운 가치관과 가정과 사회의 연계나 형태 등에 대한 막연했던 생각을 보다 구체화 할 수 있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을 것이다.
    스페인 항구 (1928 년) - 에세이,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1930)를 통해 나혜석은 가정의 구성, 가풍, 주부의 권위, 부부 생활, 인가, 도덕, 하녀, 세탁과 의복, 주방 등 세세한 삶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밝힘으로서 외국 가정의 형태와 그 안에서 주부가 갖는 역량이나 역할 및 영향력이 조선 사회와 어떻게 다른 지를 알려주고 있다. -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 회견기 (1936)는 여성 참정권 운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나혜석은 구미의 가정의 합리적 삶의 양식과 사회적 참여 등을 마치 르포 형식으로 한국 사회에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외부 사회의 여성의 모습을 여성의 시선으로 조선 사회에 소개하고, 조선 여성도 실질적 권리를 주장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스페인 해수욕장 (1928 년) 그녀는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몸소 실천했다. 또한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는 남자, 여자 이전에 사람이라며 여자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줄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파리풍경 그러나 파리 한인 사회에 화제거리가 된 최린과의 염문설이 빌미가 되어 1930 년 나혜석은 이혼을 당한다. 그 때 나혜석의 나이 35 세였다. 나혜석은 이혼 후에도 1931 년 조선미술전람회와 제12 회 제국미술원 전람회에서 특선과 입선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다. 남편과 이혼한 뒤에는 그림에만 몰두하였고, 1933 년에는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하였다.
    선죽교 1934 년에는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여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최린에게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도쿄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니겠습니까.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詛嚼)시키는 일이 적지 않사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未開明)의 부도덕한 일입니까. - 1934. 삼천리호 8, 9 월호 '이혼고백서'중에서
      자화상 (1928 년)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 1935. 2 월호 <삼천리> 그 당시만 해도 여성이 정조를 잃는다는 건 목숨을 잃은 것과 다름없었다. 목숨과도 같은 정조를 한낱 취미로 치부하다니... 그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 뒤부터 나혜석은 문제적 인물이 되었다. 오늘 날에 와서도 혜석은 요부의 소설이나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별장 (1935 년) 1935 년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하고 1936 년에 소설 <현숙>을, 1937 년에는 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였고,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보수적인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풍경 1935 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 친구인 김일엽이 수도중인 수덕사와 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갔으나 상당히 곤궁한 생활을 추측할 뿐으로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었다. 1949 년 3 월 14 일 <대한민국 관보>는 한 행려병자의 사망을 실었다. 사망 석 달만이었다. 환자는 다른 사람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나이 53세 본적 미상 주소 미상 가진 것이라곤 헌옷 한 벌이 전부였다. 남긴 거라곤 이름 석 자뿐이었다. 나.. 혜... 석.... 이 글을 쓰는 동안 나혜석의 어린 자녀들이 떠오르곤 했다. 그 가엾은 아이들은 자라는 내내 자신의 어머니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견뎌내야 했을까? 자신들이 나혜석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사실이 더없이 참혹하고 비참하며 부끄러웠을텐데... 생각하면 할 수록 가슴이 아팠다. 그들이 오래 살아 지금의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어머니를 진심으로 용서했기를... 바램해 보면서 이생진님의 시가 있어 함께 올려본다. 경희야, 나 아직도 그 소리가 / 이생진 -나혜석거리를 거닐며 *경희야, 나 아직도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시집가라는 소리 윗집 마님은 학교 그만 두고 부잣집으로 시집가 아들 딸 낳고 살라는 소리 여자가 공부해서 뭘 하느냐는 소리 사내니 사또가 될 거요 주사가 될 거요 지금 세상 사내도 배워가지고 쓸 데가 없어서 야단인데 여자가 배워서 뭘 하느냐는 소리 어머니는 하던 공부 다 해야죠 하고 내 편을 들었지만 갈수록 가늘어지는 목소리 아버지는 계집애를 일본까지 보낸 것이 잘 못이라며 공부시켜 놓으니 시집가기 싫다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갈수록 굵어지는 목소리 그 소리가 인계동 아니 광화문 네거리에서 내가 다니던 학교 교문 앞까지 들리는 것 같아 여북하면 인형의 집 노라를 내세워 하소연했나 문을 열어 주라고 경희야, 나 아직도 할 말이 많아 여자는 사람이 아니냐는 소리로 시작해서 나 아직도 할말이 많아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감꽃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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