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시미술 - 신비에 싸인 기원
위의 제목의 원시(Primitive)라는 용어는 '미개인' 또는 그들이 우리보다 단순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거쳐온 문명 이전 상태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는 뜻에서 사용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미술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랜 된 것은 구석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전의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조각된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술적인 것으로 사료된다. (원시인들은 무엇이 그림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잘 분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창에 찔린 동물들을 보면서 동물보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공포심을 제거하여 자신있는 사냥을 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주술적인 힘을 빌리려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괴이한 모양의 물건들에 자신의 상징을 새겨 넣는 과정에서 이른바 부조라는 것을 창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기원전 15,000~10,000 오스트리아)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항(풍요와 다산이 아닐까?)을 작품에 실어서 표현한 것임을 추측 할 수 있다. 빌렌도르프 비너스 Willendorf, Venus of(기원전 25000∼20000)
1909년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여성나상(女性裸像). 빈의 자연사박물관 소장.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7개의 구석기시대 유적 중에서 제2의 9층(層) 문화층에서 발견된 것으로, 발견된 여러 개의 유물 중에서도 가장 알려져 있다. 여성나상은 2개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높이 10.3 cm의 석회암제이고, 다른 하나는 19 cm의 상아제이다. 유방·복부·둔부 등이 극단적으로 과장된 이 나상은 생식·출산(풍요다산)을 상징하는 주술적·원시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 시기는 오리냐크기(期)에 속한다. |
이 중에 현저한 유적들은 1912년에 프랑스에서 베구엥이 발견한 뒤끄·도두베르 동굴, 1923년에 가스트레가 발견한 몽떼스빵 동굴, 1927년에 마르땡이 답사한 르·로끄·드·세르 동굴등이다. 그리고 1940년에 이 고을의 소년들이 발굴한 라스꼬 동굴은 유명하다.
예술이란 항상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해 느끼는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일반적으로 지식과 감정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화가가 보고 또 알고 있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가, 아니면 느낀 것에 더 흥미를 가지는가에 따라 그림도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인류가 채집경제에서 벗어나면서 질서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종교를 발생시키게 된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의 작품, 스톤 헨지 (기원전 15~19세기경, 영국)는 우리에게 어떤 경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면서 초인적인 것을 느끼게 한다. (스톤헨지는 태양숭배의 기념물이다.) 이와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와 작업에 있어서의 노동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동기가 되는 힘은 바로 종교적인 것이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며, 여기서 그들은 일상을 지배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의 미술 또한 우리에게 생활과 연계하는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원시적 주술의 유효성을 보이는 사나움은 구석기 시대의 수렵 주술에 있어서의 현실에의 충실함과 마찬가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영웅들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상기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새를 머리에 얹은 남자상(BC 19~20C, 뉴기니의 세픽강유역), 수호자상(19~20C, 가봉)을 예로 들 수 있겠는 데, 이들의 공통점은 그 시기에 있어서 정령이 깃드는 곳이라는 믿음을 지녔던 곳이 머리였음을 알 수 있다.
2. 이집트 미술 - 영원을 위한 미술 (B.C.3000 ~ 300)
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 흐르고 있는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해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창한 문명이 바야흐로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들을 중심으로 왕이 통치하는 고도로 조직화된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또한 도시와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들의 최고의 작품은 역시 회화였다. 이 작품들을 볼 때, 형상에 거의 사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영효과가 없고, 벽에 밀착된 것처럼 평면적이고 형상의 세부묘사가 생략되어 있다. 약화법으로 간단히 그려진 단순화된 형상들은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을 누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후생활에 있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육체가 필요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이집트인들은 미이라를 만들고 천으로 그것을 싸서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을 견고한 관에 넣었다. 또한 이집트인은 죽은 사람의 영혼도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활용품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일상의 자재도구등을 분묘에 비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분묘에 매장이 불가능한 것은 묘실의 벽에 그림으로 그렸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에서는 분묘가 건축, 조각, 회화의 거의 모든 것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집트 미술은 문자 그대로 死者를 위한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중왕국 시대에 히크소스족의 침입으로 테베라는 도시를 제외한 전 이집트의 지배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1570년경 테베의 군주들은 침략자를 축출하고 이집트 전토에 통일된 지배권을 되찾았는데, 이와 같은 이집트 황금시대의 도래를 신왕국 시대라고 일컫는다. 이 시대의 미술의 특징은 2000년 전에 정립된 회화 및 조각의 엄격한 규칙을 답습하고 있기는 하나, 때로는 대담한 자유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규모에 있어서 아주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도 엿볼 수 있다. 헤시라의 분묘에서 보았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작품이 발견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전작에서 발견되지 못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전의 미술 작품을 지배하고 있던 모종의 질서에 대해 상당부분 자유로와 졌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측면과 정면 시선이 서로 교차되고 있었던 고왕국 시대의 작품에 비해, 측면 시각의 사용을 억제한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 아크나톤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지는 데, 이는 수도를 옮기면서 활기찬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장려하였다. 아크나톤의 부조상을 보게 되면 이러한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흉상에서도 볼 수 있다. 채색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움과 사실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크나톤 Akhnaton (?~?)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0대 왕(재위 BC 1379∼BC 1362). 이크나톤·아멘호테프 4세라고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며 왕비는 네페르티티이다. 당시 이집트는 아시아에까지 세력을 펼쳤으며, 나일 계곡에는 많은 외국인이 생활하고 있었다. 왕은 모든 민족에게 공통의 세계종교를 이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노모스[州]에도 속하지 않는, 태양을 상징으로 한 유일신(唯一神) 아톤을 신봉하였다. 그러나 수도 테베는 주신(主神) 아몬의 사제(司祭)들이 권력과 막대한 부(富)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치세 6년째에 자신의 이름을 ‘아톤에게 이로운 자’라는 의미인 아크나톤으로 개명하고 테베를 버린 다음, 새 수도를 텔 엘 아마르나로 옮기고, 아케트 아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전국의 신전·기념비·무덤에서 아몬의 이름을 지웠다. 왕은 명상에 빠지고 아톤 찬가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왕의 이상은 이해받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몬 신앙은 부활하였으며, 수도는 다시 테베로 옮겨졌다. 그러나 자연과 진실을 중시하는 아톤의 가르침은 사실적이고 명쾌한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탄생시켰다. |
이러한 양식은 이크 응 아톤의 타계 후에 다시 아몬 신관들이 득세 했을 때에도 볼 수 있는 데,
그 예가 바로 투탕카멘의 묘이다. 투탕카멘 Tutankhamen (BC 1370~BC 1352 ?)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한다. 제10대 왕 이크나톤(아멘헤테프 4세)의 아우 또는 조카라고도 하는데,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제11대 세멘크카라는 만년에 이크나톤과 공동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9세에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제3왕녀인 안케센아멘이다. 왕은 처음에는 아텐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텐으로 칭하였으나, 즉위 4년째 아멘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멘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연소한 투탕카멘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 아이와 노장 할렘헤브(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왕묘가 테베의 서쪽 교외인 ‘왕가의 계곡’에 조영된 탓으로 이 묘가 발굴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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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메소포타미아
기원전 3500년경에서 3000년에 걸친 기간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낀 비옥한 땅에서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태동시킨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는 모두가 신의 소유로서 신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신을 대신하고 있는 신관이 모든 국가의 행정을 통치하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신전을 중심으로 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메르의 조각은 건축보다 많은 양의 작품을 아직까지 남기고 있는 데 그것이 바로 돌로 된 소형 인물상군이다. 수메르의 조각가는 소재에 있어서 금속이나 나무를 소재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이집트 미술가와 비교하여 훨씬 규칙에 속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문자시대, 수메르 문명 | 아카디안 왕조 | 우르 왕조 | 바빌로니아 문명 | 아시리아 문명 | 신바빌로니아 왕국 | 페르시아 제국 | B.C. 3500 | B.C. 2350 | B.C. 2150 | B.C. 2000 | B.C. 900 | B.C. 612 | B.C. 538 | B.C. 331 |
4. 바빌로니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이라크의 남부를 바빌로니아라고 했다. 최초의 주민들은 수메르 인들로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문자를 발명해 그들의 문화와 종교·예술을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전파시켰다. 수메르 인들은 전반적인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예술·종교·문학에 있어서도 고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기술을 지혜의 화신인 에아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3천년 초 바빌로니아의 도기 제작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앗시리아의 아르파시야와 이란의 수사에서 출토된 도기는 모양도 아름답고 채색한 장식의 취향과 기술도 뛰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건축에는 진흙과 짚으로 만든 벽돌과 삼목이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궁전이나 신전의 외벽은 화려한 장식을 붙여 치장했으나 내구성이 없는 진흙 벽돌로만 되어 있어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빌론의 건축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바빌론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는 약간 튀어나온 버팀벽이 달린 정면과 계단을 쌓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된 수직의 수로와 총안이다. 또 가장 독특한 건축물은 '지구라트'라고 하는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이것은 모든 주요 신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거대한 진흙 벽돌을 층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게 쌓고 꼭대기에는 성전을 만들어 바깥 계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는 팔장을 낀 자세의 자연스러운 환조 석회석상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돌 공예의 진정한 매체는 저부조이다. 벽화와 함께 발달한 이 부조는 채색이 되어 있으며, 입체적 효과를 덧붙인 정교한 벽화의 변형이다. 벽화는 고운 바탕의 흰색 석고벽에 검은색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붉은 색과 검은색과 칠했으며, 청·황·녹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벽화는 전형적인 왕실 의식·제사·서임식·사자의 사냥 장면등을 묘사한 것으로 릴리프에서와 같이 인습에 따라 머리와 다리는 옆 모습, 몸통은 앞 모습이며 눈은 보통 앞을 바라보고 있다. 바빌로니아 고유의 특징적인 조각은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원통형 도장에 무늬를 조각한 '미니아튀르'이다. 기원전 5천∼3천년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 도장은 서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발달 순서가 분명히 나타난다.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아카드 시대에 제작된 것들로 주제도 흥미롭고 완성품의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그 외에 조개나 유리·돌·상아로도 모양을 만들고 조각을 해서 큰 작품을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으로 사용했다. 동이 사용된 예는 유사 이전에도 발견되었으나 많은 양을 사용하고 또 장식용으로 금속을 쓴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최초였다. 그들은 금·은·동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처음에는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 적조물로 신전이나 궁전 입구에 괴물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 5. 앗시리아 (기원전 1,000년경 ∼ 612) 앗시리아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슈메르·악카드의 전통을 잘 소화시켰고 그 위에 전혀 다른 경지를 열어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 하나의 새로운 유형을 명확히 창조해 그 지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리아, 소아시아, 더 나아가 에게해 주변의 미술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앗시리아 미술의 새 경지란 공적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어서 외정(外征), 향연, 사자사냥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며 기록성을 중시했다. 특히 동물의 표현에는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을 발휘하고 있다. 현실주의 스타일로 강력한 힘의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생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착을 고집하는 성격을 이런 앗시리아 미술에서 볼 수 있다.
6. 에게 미술
에게 해는 크레타 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만이며, 에게 미술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생성된 미노스 문명의 해양 미술 문화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였고, 따라서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적이었다. 이 습성이 미술에도 반영되었는 데, 대표적으로 투우사의 프레스코 라는 작품이 미노스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영토의 미케네에 영향을 미쳐 생성된 것이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의 궁전은 미노스와는 달리 요새화 되어 있으며 견고한 벽면과 큰 돌로 축조되어 있다. 미케네의 사자문은 이러한 양식을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로, 상부에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돌로 된 두 마리의 사자 부조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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