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오늘은 서울 성곽 총 18.2 km 중 동대문에서 동소문인 혜화문까지의 구간 약 2.3 km 걸어가
보려합니다..겸재 정선의 숨결~~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 ~~ 성곽길 담장을 조용히 걸어가노라면 그옛날 조선시대 옛님들의 땀과 숨결 애환도 느낄수
있는 겸재님의 그림 우측 구름 피어오르는곳이 대학로 카톨릭대 주변일테고 좌측 앞쪽이 지금의 넓직한 도로 혜화동 로타리가 되겠지요.. 눈 아래로 펼쳐지는 한양 서울 장안 그리고 저멀리 빙 둘러쳐진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청계산 우면산 관악산 천하
명당자리 우리의 수도 서울 저절로 느끼게 되겠지요..성곽 위의 정다워 보이는 연인들 성곽 쌓았을 옛사람 옛님들 사랑하는 마음일테지요..보고
계시는 사진들은 2012 년 어느 봄날에 카메라에 담아 본 습작..예쁘게 보아주시구요..ㅎㅎㅎ.감사합니다..
서울 남산을 이곳에서 바라보니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태조 이성계가 1392 년에 조선을 건국하고
1394 년 11 월 한양 서울로 천도하여 조선시대 정궁 경복궁과 사직단 그리고 종묘를 우선 대대적인 건설공사를 시작해 1395 년 9 월까지
지금의 세종시 건설공사처럼 하였겠지요..
궁궐과 사직 종묘 공사를 거의 완공하면서 바로 이듬해인 1396 년 1 월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추운
겨울에 전국에서 공사 인원을 동원하여 서울 도성 공사를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완전히 돌로 쌓아올릴 여력이 없어 흙으로 쌓기도하고 군데 군데 돌로
쌓기도하고 여하튼 좀 엉성하긴했어도 도성을 빙 둘러 에워싸는데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해야겠지요..
1396 년 그해 겨울 가을걷이 농사를 끝내고 올라온 전국의 인부들 약 12 만명으로 당시 한양 서울
총 인구 10 만이었으니 서울 총 인구보다도 더 많은 일꾼들이 동원됐으니 공사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할수 있네요..약 50 일간의 공사를
마무리하고 못다한 구간은 한여름 8 월경 2 차공사때나 해야겠지요..조선시대 첫 대규모 토목 공사였네요..거의 대부분이 흙으로 된
성곽이었을테니까요..
공사 현장에 임시 막사 안에서 새우잠 자고 눈 비비고 일어나 아주머니들이 차려주는 밥 한그릇에 반찬
몆가지 꿀맛같았을 옛님들의 공사현장 바로 이곳에서 나는 그저 걸어가면서 느끼기만하고있으니 미안한 마음뿐이네요..저멀리 북한산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건마는~~
낙산 구간 성곽길에서 바라다 보이는 인왕산과 안산 산줄기 능선도 옛님들께서 바라다 보았을 그 풍경
그대로 변함없구요.. 산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다 어디로 다 가시고 안계시네요..에고고 인생무상 덧없는 한점 흘러가는 구름 바로 우리
삶이라네요~~에고고 ~~
그옛날에 초가집 몇채 농촌 마을 듬성듬성했을 저곳에는 지금 보여지는대로 고층 아파트와 고급 주택들로
가득하기만합니다..
서울 성곽 공사는 1396 년 9 월 일단 마무리하였지만 중간중간 개 보수를 주욱 이어져 오다가
1422 년 세종 임금때 튼튼하게 돌로 다시 공사를 대대적으로 했으며 숙종임금 시절 1704 년에 거의 완벽하게 공사를 마치니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된것이니 수고들 정말 많이하신 옛님들이셨습니다..
아름답게 조성된 꽃길 걸어가면서 돌 성곽 손으로 쓰다듬어 보기도합니다..단순히 돌의 느낌이 아니라
300 년전 400 년전 500 년전 600 년전에 살다가신 조상님들과 악수하거나 서로 손을 맞잡은듯 그런 감정이 되네요..어루만져 보고
쓰다듬어 보고 말을 걸어보기도합니다.. 그옛날 너는 어떡 석수장이 석공의 수고로움으로 또 누구의 손길로 지금 이렇게 이자리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것이냐 ??
검정색은 아주 오래된 돌일것이고 그리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은 그 후에 축조된것일테고 수많은 옛님들의
땀과 눈물 숨결소리 생생히 들려오는 서울 성곽 낙산 구간 걸어가고 있네요..
돌로 쌓아 올리는 힘든 재 공사이다보니 지난 태조 이성계 시절보다 세종때 무려 전국에서 동원된 32
만명이나되는 엄청난 큰 공사였으니 1000 여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날 정도로 고된 건설공사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아아~~ 정말 대단하였네요..
지금의 4 대강 공사는 포클레인과 운반 차량 건설 중장비도 많고 시멘트와 콘크리트 철근 그럼에도 힘든 큰 토목 공사인데 하물며 그옛날에는 아아
가만 생각해보고 있으려니 옛님들의 국방 안보 조국 나라 사랑 가히 놀라지 않을수없네요..
어떻게 지키고 세운 나라인데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될일이겠지요..계속 걸어갑니다..
한줄기 바람 도심은 희뿌연 매연으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이곳 성곽길에는 서울 남산처럼 많은 인파가
몰려들지 않는 조용하고 한적하기만하니 걸어가는 내내 많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그만일듯합니다..
남산 자락 아래 충무로 방면이 가까이 다가오지요..
아아 ~~참으로 오렌 세월이 지나가 버렸구나 ~~ 저절로 숙연해져옵니다..돌 성곽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뿐인데도말입니다..
서울 한복판 중구 명동 을지로 종로 광화문 한복판 방면의 지금 2012 년 이시대입니다..
예술과 낭만 환상적인 프랑스의 몽마르뜨 언덕길을 상상하면서 걸어가도 좋을듯하고 검게 변해진 오래된 성돌
쓰다듬어 보아도 좋겠고 ~~
성돌 앞에서 옛님의 숨결 아련히 떠올려 보는 시간 여행자가 되어 보는것도 특별한 호기심으로 묘한 여운이
아른아른해 그랬으면 더 말할것없이 성곽길 걷는 알찬 실속형 느낌일수도 있어서 좋겠구요..
프랑스의 그옛날 음악가 예술가들이 100 여미터 높이의 몽마르뜨 언덕에 올라와 프랑스 시내를 내려다
보고 예술 감각 발산했다면 우리의 이곳 성곽길은 그옛날 성벽 쌓던 토목 기술자 석수장이 석공 기술자 풍수지리 전문가 군사 요새화 전문가 단순
노동자 등등 프랑스 몽마르뜨 언덕보다 수백 수천배의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다닌 여기 이 성곽길이 아닐수없네요
성곽위의 다정스런 연인들 사실 이 풍경은 불과 수십년 전부터였지요..남녀7 세 부동석이었는데 남녀가
같이 어림없었을 그옛날이었는데 세상이 변하여 사랑하는 연인들이 대학로에서 술한잔 하고나서 여기로 야간에 올라오면 서울 야경이 휘황찬란하여 묘한
분위기에 그만 사랑이 이루어지고 프로포즈하고 장래를 약속하는 결혼에 이르게 되는 지금시대의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한 이곳입니다..
멋져부러~~젊음 청춘이 마냥 좋은시절인것을 ~~부디 옛님들 앞선 시대에 살다가신 옛사랑 옛 민초들 잠시
잠깐만이라도 기억해 주셨으면~~나라 사랑 조국 사랑 ~~오래 오래 그옛날 옛님들의 꿈과 사랑 눈물과 죽음 아주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부디 기억하여
주오 ~~
정지용 시인의 향수..시가 생각납니다..옛님들께서 공사에 동원되어 일하는동안에도 머나먼 고향 태어난
시골 향수 이랬을테지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돌아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룸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동대문 옆 성곽 돌에 이름을 새겨 놓은 옛님들의 흔적이 먼훗날 살아갈 후세인들에게 뭘 말하려는지 글씨가
삐뚤 그리 예쁜 글씨는 비록 아니지만 뭉클함으로 다가오는것은 그 깊은 의미가 담겨있으니까요..사랑하는 나의 먼 후일에 후세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 위해서요..
동대문 그리고 두산타워 보여집니다..
꼼꼼히 견고하게 높이 쌓아 올린 성곽길 옆을 걸어갑니다..소달구지 일꾼들 분주히 지나다닌 길이지요..
성곽길 수백년 지난 세월이여 ~~ 옛님들께서 걸어가시면서 나누었을 옛 이야기 사연 사연 그 얼마나
많았을런지 기쁜일도 슬픈일도 ~~
결혼식 중매를 어느집 도령과 어느집 규수가 어떻게 혼례를 올리게 되는지 갑돌이 갑순이는 또 어이어이
인연으로 사랑을 기약하는지
어떤 양반네 누구누구랑 술먹고 싸워 갓끈 떨어지고 도포자락 찢어졌는지도 메아리 이야기 저 먼 하늘에
사연 떠나갔을테고요..
나라의 돌림병으로 가난한 백성들 어린이와 부녀자들 수천명이 죽어 나갔던 사연도 있었을테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국가의 존폐가 바람앞에 등잔불 처지가 되었던 이야기도 모두모두 사라져 가버렸지만요..
나라의 힘이없어서 당한 일본 식민시대의 뼈아픈 상처도 동족상잔의 6.25 이제 다 사라져 가버린 지난
세월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통일은 커녕 남북으로 반쪽 되고 동서로 대립하고 마침내는 세대 갈등까지 이러고들 살아가고 있으니 ~~에고고
~~조상님들이시여 ~~
지금 이 시대 2012 년 살아가는 님들의 후손 저희들 어찌해야합니까 ?? 부끄럽고 죄송하고 면목없어
어찌 장차 님들을 뵈올수 있으려는지요..가슴치고 통곡하고 울어본들 소용없는 일~~마냥 이러고 있을순 없을터 ~~차근차근 하나하나 원점에서 다시
기반을 닦고 계획하고 교육하고 부지런과 성실함으로 온국민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힘을 모아 나가야겠지요..
그옛날 옛적에 보리고개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 가족수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숙모 고모 그리고 년년생 형제자매들 7남매 8 남매 10남매 이상도 많았었지요..보리밥에 죽 개떡에
그래도 가족들 굶기지 않으려고 애쓰신 부모님들이셨습니다..
대다수가 초등학교만 나오고서도 살아가는데 어려움없이 서로 화목하게 그래도 정겹게 살다가신
옛님들이셨네요.. 지금은요 ? 보리고개는 뭔 소린지도 모르고 가족은 뿔뿔이 따로따로 4 인가구 2 인 가구 급기야 나홀로 살아가는 쪽방촌
할아버지 할머니들 자식은 있어도 찿아 돌보지 않고 시집 못간 노처녀 장가 못가는 노총각들 혼자서들 원룸이다 고시텔에서 에고고 ~~세상참 ~~나원
이런~~
옛날에 가정환경은 또 어땠습니까 ?? 마을 어귀 공동 우물가 샘터에 머리에 물동이 이고 물길러 오는
젊은 새댁이며 아주머니 물지게 양동이 지게지고 물길러오는 만덕이~~도시가스나 연탄 전기가 있나 수도가 있나 라디오 텔레비전이 있나 치약 치솔
빨래비누 세수비누가 제대로 있었나 ??
목욕탕 시설이 다 뭡니까 ?? 이발실 미용실 호화 사치일뿐이죠..1 년에 여름날 무더운 여름날
등목하는것이 목욕이요..추운 겨울에는 아예 목욕도 못하고 다시 여름날이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니 벼룩과 이가 머리와 옷 속에 생기고 옷을 벗어 이를
잡고 그옷을 다시 입고 살았으니~~겨울에 빨래를 추운 얼음물에 하기도 힘들고 한다한들 마르지 않고 꽁꽁 얼어버리니 갈아입을 여벌의 옷없는 달랑
옷 하나인것을~~
가만히 지난날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환경과 의식주 생활속에서도 이러한 성곽 쌓아올려 먼후일 후손들
위하셨는데 아아~~지금은 정말 해도해도 너무들 다들 난리입니다..넉넉하고 풍족한 살림살이 만족 못하고 끊임없이 돈.돈 돈.모두가 이러고들
살아가는 현대인들~~ 잠시 상념에 잠기면서 성곽길 계속 걸어가고 있네요..제가 이러고 있네요..저 또한 크게 별반 다르지 않지만요..에고고 ~~
동소문 밖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으며 느티나무 옆집에 용한 무당이 살았다는데 지금은 미아리
고개 근처로 밀려나 점집들이 모여있는것이 이런 연유인듯 생각되네요.. 지금의 혜화동로터리 좌우 언덕으로 동소문까지 빨간 앵두나무 지천이었었는데
이 또한 모두 사라져 갔네요..
동소문인 혜화문 나서면 삼선교 지나 미아리 고개 가는 도중 성북동 골짜기를 흘러 내리는 실개천이
구불구불 깨끗한 모래와 수석 돌맹이 가득하고 소나무숲 향기 들꽃 향기 보리밭 드문드문 초가 마을 개 짖고 병아리들 뿅뿅뿅 앎탉 뒤 따르며 모이
줏어먹던 평화스러운 신선이 사는 마을인듯 한가한 풍경 ~~그림같은 옛풍경 사라진지 오래 되었네요..
고종임금때 시인 이제구 시 한수 읽어 봅니다.. 동소문밖 나서니 성시 티끌 볼수없고 // 나귀 등에선
붉은 석양이 이글거린다 // 들판의 국화 시냇가의 단풍 // 서로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이루었구나 //
조선시대 중종 6년 1511 년에 동소문은 혜화문 < 惠化門 > 이라는 새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네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북악산쪽으로 50 여미터 옮겨 복원하긴했지만 많이 아쉽습니다..
혜화문 통행하던 옛님들 나뭇짐 지게 옹기장수 소달구지 신작로 흙길 자갈 돌 뒹굴고 길가 양편에는 초가
삼칸 지붕엔 박덩쿨이었네요.. 아아~~어쩜 이런 시절이 있었다니 ~~옛사진 보고 있노라니 너무나 한가하고 조용했을 정겨운 풍경이 아닐수없네요..
세사람 신선이 산다는 삼선 < 三仙 >~~능금꽃 복사꽃 대나무와 노송 뽕나무밭과 이름 모를 들꽃밭 ~~아아~한폭의 그림이로고 ~~
꼬끼요 수탉 울음소리에 새벽녘 잠을 깨우면 ~~멍멍 ~~컹컹 ~~ 개 짖는 소리하며 ~~음메~~송아지
엄마젖 빨던 그옛날 동소문 혜화문 밖 지금의 혜화동 로타리에서 미아리 고개까지 가는 좌우 양편 풍경 이야기였네요..상상이 잘 안되는
지금시대이지만요..
혜화문에 대한 옛 기록도 참 많답니다..시인묵객들이 북한산과 도봉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
혜화문이었구요.. 도성에서 사람이 죽어 상여소리 상여꾼들이 빠져 나가는 행렬 혜화문이었네요..100 여년전 혜화문을 성곽 위에서 바라다 본
옛사진 이젠 영영 다시 볼수없는 옛풍경 되고말았습니다..아아~~애틋하여라 ~~너 혜화문 동소문아 ~~ 지금의 한성대 입구역쪽에서 바라다 본 도로 한복판 언덕배기에 있었던 동소문 혜화문 ~~ 우측에 초가집 따스한 온돌방 그립고
좌우측으로 나뭇가지 적당하고 문루 기와지붕은 손질 못해 엉성하긴해도 너의 이모습 지금까지 이자리에 그대로 있게 못한점 안타깝구나 ~~돌담장 옆
초가집 수줍고 부끄러워 흰옷 입으신 옛님이시여 ~~동소문밖 능금골 꽃파는 가게 꽃집 처녀를 알고 계시는지요 ?? 도로를 우회해 만들수도 있었고 너를 두고 너의 땅 깊이 도로를 만들수도 있었을터인데~~아마 지금시대라면
가능했을터인데~~일제시대때에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도시 계획으로 그만 너를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아아 ~~힘없는 나라에 나라잃은 슬픔이
아니겠느냐 ~~ 너를 잃고서 수십년이 지나도록 흔적조차 남겨두지 않은 너를 이렇게나마 그래도 복원해 준 1994 년
10 월 김영삼 대통령 문민 정부 시대에 얼마나 감사해야할지를 ~~날아갈듯 아름다운 기와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 아아~~옛날 그대로의 동소문은
비록 아니지만 어찌 너를 어여삐 여기지 아닐수 있으랴 ~~
다른 문과 달리 특이한 것은 혜화문은 천장에 봉황을 그렸는데 이것은 혜화문 밖 지금의 삼선동 동소문동
한성대 입구 성신여대 입구 지역의 논밭에 참새떼가 엄청 많이 몰려와 농사에 막대한 큰 피해를 주기에 이 새들에게 겁 주려고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는 의미인데 이런 생각을 했다는것은 그만큼 순수한 당시의 사람들 조상님 옛님들~~아아 보세요..어린 두아들을 데리고 나온 옛님을요..
혜화문은 그옛날 저 아래 도로 한가운데로 돌아가기를 소망하고 있을까 ??
펜으로 그린 그옛날 동소문 혜화문 아련히 스쳐지나갑니다..파노라마처럼요.. 낙산 성곽 동소문밖 ~~
작약꽃밭 목단화 시골 마을에 마음씨 곱고 예쁜 그 꽃집 처녀 만날수 있으려나 ?? ~~아마 모르긴해도 상상속으로는 분명 만날수 있고말고요..
너 혜화문아 ~~ 앞으로 그 어떤일이 있더라도 천년 만년 우리들 먼 후세에 영원히 살아남아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노라 ~~ 원래
자리로 돌아갈수 있다면 더더욱 좋은일일테고 설령 제자리 돌아갈수 없다면 지금 이자리라도 좋으니 끝까지 영원영원하기를~~
조선시대 천재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동소문~~ 문루없는 반쪽짜리 혜화문아 ~~이 그림 보고 있자니
더더욱 네모습 가련하구나 ~~ 어쩌다가 이 지경 이 아픔도 있었더란말이냐 ~~좌우로 큰 노송들 보이고 우측 구름이 머무는곳이 지금의 대학로 주변
카톨릭대일테고 그림 왼편 앞쪽이 혜화동 로타리일테니 어디어디 좀더 너를 자세히 보아야겠구나..동소문을 바라보았을 겸재님 그리워하면서말이다..
동소문 밖 도로 가운데 큼직큼직한 돌 덩어리 보이고 왼편에 초가집 우측으로 우람한 성곽 돌 담장 ~~아아 그랬었구나
~~너의 지난 그 옛날이 이러했었구나 ~~전차 다니는 길 만들기 위해 1939 년 일제시대 동소문 고개를 깎아내고 또 깍아내어 길을 넓히는
바람에 너는 옆으로 비켜나 그옛날 얼마나 그리워할는지를 나는 너를 이해하고 알아줄터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아다오..
지금 혜화동
로타리에서 삼선교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 마루 북쪽 도로 한가운데 네모습 동소문 밖 초가집에는 무슨 물건 파는 상점인듯 그렇게 보여지기도하고 흰옷
입고 계시는 아주머니 얼굴도 보여지니 불과 100 여년전 옛님들이십니다..
동소문 혜화문
그림 그렸을 겸재 당시 문루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한동안 문루가 아치 형태로 되고만것을 ~~ 영조 20년1744 년 8월 불탄 지 152년 만의 일이고 겸재 나이 69세 때 이 그림 그려졌으니 알만도하구나..에고고
가엾은 동소문이여 ~~ 겸재님께서 문루 없는 동소문 일대 진경을 남기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을터인데 ~~동소문 혜화문~~ 노송에 구름은 무심히도
흘러가건만 ~~ 높다랗게 능선을 따라 성 안쪽 노송 우거진 산봉우리 ~~흰구름 머무는 산속 마을 아아~~여기가 바로
신선이 사는 산동네 동소문 혜화문이 아니었을까 ?? 동소문밖 꽃집 처녀 저하늘 저멀리 선녀 되어 떠나가셨으니 ~~오늘 이만 저도
끝마무리하렵니다.. 낙산 성곽 동소문밖 ~~ 작약꽃밭 목단화 꽃집 처녀 그 아가씨 오늘밤 우리 모두 꿈속에서나 만나 보아요
?? 감사합니다..